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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2번째) 깊게 자리잡은 필리핀 봉사체험

제1622번째

깊게 자리잡은 필리핀 봉사체험


문득 본과 3학년 때 떠났던 러시아 의료봉사활동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배 선생님들을 따라 덜컥 따라나섰던 그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까다로운 입국심사 때 등 뒤에서 흘러내렸던 식은땀 한줄기, 4평 정도의 조악한 공간 속에서 낡은 핸드피스를 들고 열심히 진료하시던 선배님들, 그리고 그 옆에 잔뜩 긴장한 채 어설픈 원내생 포즈로 석션을 잡고 서있던 저, 아무리 번호표를 쥐어주며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도 문 옆에 다닥다닥 서서 기다리던 아이들…당시에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머릿속이 새하앴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역시 그날의 경험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는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선배 치과의사 선생님들을 따라 다시 한번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필리핀의 나보타스시였습니다. 필리핀에 입국한 첫날, 나보타스의 해상판자촌을 견학하게 됐습니다.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시멘트 바닥이 흙탕물로 흥건합니다. 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운동화에 흙탕물이 튈까봐 조심조심 걸었습니다. 그러다 해상판자촌으로 이어지는 좁고 기다란 통로를 보고는 그만 아연하고 말았습니다. 폭이 1미터 될까 말까 싶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머리 위 빨랫줄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무방비상태로 맞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던 깡마른 아이들…일을 하다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안녕하세요’ 서툰 한국말로 수줍게 웃던 아가씨들…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해맑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저는 새삼 제가 신고 있던 새 운동화와 들고있던 카메라가 민망해졌습니다. 두다리를 디딜 땅이 없어 바다위에 땜나무 집을 만들어 생활하는 나보타스의 해상 판자촌 사람들을 저는 이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다음날부터 당장 진료가 시작됐습니다. 빼곡이 줄을 선 환자들은 이가 하나도 없는 할머니부터 5살짜리 어린이까지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어금니가 많이 썩어 장기적인 치료가 불가피한 어린이들과 틀니가 꼭 필요한 노인들…우리에게 주어진 3일이라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손이 다급해져 왔습니다. 뿌리밖에 남지않은 8살짜리 여자아이의 제 1대구치를 정신없이 발치하며 맘속으로 크게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마냥 속상해하고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문밖에서 빼꼼히 쳐다보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빨리빨리’를 외치게 됐습니다.


어느 중년 환자분이 오른쪽 위 어금니를 뽑아달랍니다. 분명 충치가 있긴 했지만 발치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서툴기 그지없는 영어로 왜 그 치아를 뽑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더니, ‘It"s destoryed" 망가졌기 때문이랍니다. 치아는 망가지면 뽑으면 되는데 왜 굳이 비싼 물을 몇모금이나 들여가며 관리를 해야하는지 이들은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치아는 관리만 잘하면 평생 건강하게 쓸 수 있습니다”라며 설득해보려 하지만 이내 말문이 막힙니다. 영어를 못해서가 아닐테지요.


치료를 훌륭하게 마친 다섯 살짜리 어린 아들이 대견한지, 젊은 엄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Good boy"를 속삭이며 저에게 고개숙여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Good boy" 정말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씩씩하게 마취 주사를 맞은 어린이들에게 저는 ‘Good boy, Good boy" 몇 번이나 칭찬해주었습니다. 어쩜 다들 그렇게 잘 웃고 잘 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아주머니는 저를 잡고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틀니를 아래 위 다 만들고 싶은데 불가피하게 한쪽만 제작이 가능하다 하여 속상하신 모양입니다. 저도 속상해서 그냥 웃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같이 멋쩍게 웃으시더군요.


그렇게 정신없이 사흘이 지났습니다. 삼백오십명가량의 나보타스 시민들이 우리의 좁은 간이 체어를 거쳐갔습니다. 삼일째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가 있어서였는지 더더욱 많은 환자들을 보았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누군가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무리 자화자찬이라지만 기분이 좋은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 혼자 했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었지만 우리가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나 좋습니다. 숟가락 한가득 밥알을 삼키며, 내가 이 미라클한 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되려 감사히 느껴졌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봉사를 하러 왔는데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내가 더 감사하다니, 아무튼 기적같은 일입니다.


마지막날 잠깐 마을의 교회에서 다시한번 그들을 만났습니다. 강종미 선생님께서 당신이 딜리버리하신 덴처를 낀 환자를 두명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덩달아 미소를 짓게 됐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몇몇 낯익은 아이들을 만났거든요.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환자를 만나면 일부러 몇발자국씩 떨어져서 걷는데 그 아이들은 참 반갑게만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경험인지, 치과의사 면허증을 받아든 후 4년동안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두어번 직장을 옮기고 이런저런 마뜩찮은 이해관계에 치여 잊고 지냈던 것들을 머나먼 나라 필리핀에서 다시 일깨우게 됐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 만큼은 제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우리 미라클한 선배님들이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씩씩하게 떠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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