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시선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는가
서울대학교치과대학이 예과 2년의 6년제 첫 입학생을 뽑은 것은 1959년으로, 장기복무 치과군의관들이 쌍수로 환영했다. 그 이전에도 군의관은 의과·치과가 다 함께 중위로 임관했는데, 대위 진급할 때면 문제가 생겼다. “경력(학력)에 2년 차이가 나는데 왜 동시에 대위계급장을 달아주는가?" 라는 것이다. “사관학교 출신은 소위로 시작하는데, 똑같이 4년제를 졸업한 치과군의관이 중위인 근거는?"
이 또한 당연한 항의였다. 대위 이후에도 진급심사 때마다 꺼림칙했던 이 문제는, 보건직 공무원이나 대학교수 등 계급이 있는 사회라면 항상 걸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었다. 예과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OJT 교육 등을 통해 선진국 의료제도에 먼저 눈을 뜬 군진(軍陣)에서 처음 제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대치의학대학원이 현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항상 치전원제도를 찬성해온 입장에서 반가운 일이다. 다만 그 이유가 정원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교과부 방침 때문이라니 다소 떨떠름하다. 단순히 정원 삭감의 숫자적인 불이익을 떠나, 효율적인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단위가 확보돼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소수정예 보다는 다소 많은 숫자가 유리하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
서울치대의 경우도 정원이 전통적인 100명보다 20~50% 이상 많았던 몇몇 기수(期數)가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입학시험 커트라인은 뚝 떨어졌지만 다양한 인재들이 서로 부대낀 경쟁의 효과가 오히려 이를 상쇄하고도 남은 것이다.
사법고시, 외무고시 또는 군 장교도, 정원을 줄여 어렵게 탄생한 소수의 기수는, 앞뒤에 포진한 대량생산(?) 기수에 밀려, 대성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예가 많다.
그러나 ‘정원 삭감"이라는 칼이 두려워 백년대계(?)를 포기하기 보다는, 비록 소수의견일지라도, “그 길이(치전원제도)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당당한 명분"을 내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본란에 실렸던 ‘전환기의 진통"이라는 칼럼에서, 치전원제도의 단점으로 논의되는 몇 가지 주장에 대한 반론과 함께 요점은 ‘인문학의 강화"임을 서술한 바 있다.
이번에는 “6년제로 회귀하려는 심리"를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어느 학교나 단체를 꼭 짚은 것이 아니니 이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첫째,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2년간 더 잡아둘 기회를 잃는다는 우려다.
강의시간 수나 등록금에서 손해다. 둘째, 역시 같은 조건에서 우수학생을 선점할 기회를 빼앗긴다는 점이다. 셋째, 그동안 예과 강의를 해온 교수들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은 모든 학생이 2년 더 학교에 적(籍)을 두게 되고, 우수한 학생은 언제라도 오게 되어 있으며, 치과대학 유지를 위한 백화점식 교수진 확보의 짐을 덜어 오히려 학교운영을 슬림화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본란의 ‘의사와 휴머니티" 칼럼에서 인문학 이수(履修)의 의미를 짚어본 바 있거니와,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아이비칼리지 등 최상급 대학에서는 학문적인 순혈(純血)주의를 가장 경계한다는 사실이다. 하버드학부 다음에는 버클리 석사를, 다시 옥스포드 박사를 거쳐 파리에서 Post Doc.을 마친 뒤 모교에 돌아와 교수가 되는, 그런 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폐 일언 하고, 남들이 다 대위 깜이라는데, “나는 중위가 더 좋습니다"라고 우기는 것은, 일말의 “스스로를 낮추어 봄"이 아닐까? 자중자애(自重自愛)의 금언은 이기심(selfish)이 아니라 자긍심(self esteem)을 가르친다. 자신을, 자신의 직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의 첫걸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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