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감성은
사랑으로 발전했고
점차 서로를 결혼 대상으로
생각해 갔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남녀의 만남은 그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생각해 보면 나와 아내의 만남도 그렇다. 그해 가을, 아내와의 그 운명적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3년 10월 24일, 그날은 ‘유엔의 날’이었다. 당시 이날은 공휴일이어서 나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도봉산에 등산을 갔는데 거기서 대학 친구들과 함께 온 지금의 아내 조길자를 처음 만난 것이다. 당시 나는 치대(본과) 2학년이고 아내는 서울음대 2학년인 젊은이로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그렇게 만난 것이다. 이 우연한 만남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생각은 당시에는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그해 겨울방학부터 우리의 사귐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감성은 사랑으로 발전했고, 서로를 결혼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단계로 자연스레 발전해 갔다. 사랑이 있는 낭만적인 대학생활-지금 돌이켜 봐도 그 시절은 행복 가득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왔다. 1965년 가을, 나는 허리 디스크가 발병하여 학교 생활이 힘들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했었다. 한의원에서 침도 수없이 맞고, 병원에 두 차례나 입원하여 물리치료를 받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때에 조길자는 사랑으로 나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좌절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다.
이러한 사랑의 힘과 애정어린 격려의 힘으로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면서도 1966년 2월 나는 서울치대를 졸업할 수 있었고, 그녀도 서울음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나의 허리 디스크는 더욱 악화되어 그해 7월 나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심보성 박사에게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말이 쉬워 디스크 수술이지, 당시 남자가 허리 수술을 받는 것은 어쩌면 ‘남자’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위험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기였기에 그것은 큰 모험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에 보여준 아내의 사랑과 믿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남자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나에게 인생을 건 그녀의 모험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나의 허리 디스크는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아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고생은 계속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군 입영영장까지 나와, 나는 대구 군의학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은 결과 허리 디스크로 인한 병종판결을 받고 귀가했다.
우리의 결혼은 이러한 시련과 사랑의 모험을 거쳐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다.
허리 디스크 수술로
고생하는 나에게
아내는 사랑과 믿음으로
격려해 주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보편화된 정서이다. 물론 결혼은 현실이고 생활이기에 연애 감정만으로 지속되는 단순한 것이 아님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사랑과 결혼의 과정을 통해 얻은 소중한 경험으로 말한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랑이야말로 한 가정을 아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살맛나는 사회를 이루는 무한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