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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870)>
음식도 잘하는 남자
김범수 / UCLA 치과과정수료

온갖재료 통째로 부글부글... 잡탕찌개 메뉴의 원조 못해서가 아니라 못하는 척할 뿐 연애시절, 아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나의 냉장고 살림이었다. 이 새침데기 아가씨는 그동안 남자 혼자 사는 아파트에 절대로 안 와보는 것으로 요조숙녀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친구들 커플이 모여서 외식을 했는데 2차 행선지는 나의 빈 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싱글 사나이의 썰렁하던 아파트에 열댓 명 손님이 모여 들었다. 짓궂은 친구들이 이 아가씨에게 마실 것을 부탁했다. “뭐 없습니까? 커피도 되고, 맥주 같은 거 있으면 주세요. 어젯밤에 드시던 것도 괜찮습니다.” 이 아가씨는 억울해서 죽겠는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히 일어나더니 일단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 보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때 아내는 냉장고 안이 텅 빈 것을 보고서 처음으로 이 남자와 결혼할까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열어 보니까 커다란 냉장고 안에 우유 한 통, 주스 한 통만 들어있더군요, 그게 참 안쓰럽게 느껴지면서.......” 콧대 높았던 아가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이아몬드 반지도 장미 정원도 아닌, 빈 냉장고였던 것이다. 내가 그 시절에 우유하고 주스로만 연명을 한 것은 아니었고 주로 사먹기 일쑤였지만 또 다른 싱글 친구 하나와 가끔씩 만나면 손수 음식을 해먹기도 했었다. 우리 두 남자가 그때 먹은 라면의 양은 라면 회사 표창장 감이다. 기분이 나면 일품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마켓에서 재료를 산더미 처럼 사다가 일제히 냄비에 넣고 끓이는 찌개 맛이 꿀맛이었다. 칼은 있었으나 도마 같은게 있을 리 없으므로 우리는 모든 재료를 손으로 찢어 넣거나 부러뜨리는 방법을 썼고 뱃속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섞인다는 신념 하에 통째로 넣어서 무작정 부글부글 끓였다. 이 세상에 잡탕찌개라는 메뉴가 있다면 아마도 우리가 원조일 것이다. 멋쟁이 L선생님은 서양요리 전문가이다. 최고 권위, 원로로 꼽히는 L선생님은 일류 호텔, 호화 유람선 회사에 계속 스카우트되어 일도 하셨고 책도 냈고 후진도 양성하신다. 이분의 요리는 요리가 아니라 작품이다. 이분의 요리를 맛보고 나서 나는 서양 요리의 참 맛을 알았을 정도다. L선생님은 남자다. L선생님의 따님이 출가를 하였다. 따님이 시집을 가서 한동안은 종종 친정에 전화를 하는데 어머님이 전화를 받으면 “아빠 좀 바꿔주세요, 지금 요리를 하는 중인데 뭘 여쭤 보려고요”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옆집 아저씨는 미국인 변호사인데 취미가 요리이다. 어찌나 요리를 즐기는지 자기 집 부엌을 소위 구어메이 키친(Gourmei Kitchen)으로 리모델 하면서 식당·주방 전문 설계사를 동원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어 번씩 취미생활을 즐기는데 우리는 순전히 이웃을 잘 만난 덕분에 그의 요리들을 한접시씩 시식하는 행운도 누린다. 한 번은 옆집에서 저녁식사 초대를 했는데 모든 요리를 남편이 만들고 부인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서 우아하게 걸아다니며 미소만 지었다. 이튿날 우리 집에 미국 손님이 왔을 때, 아내는 부러움을 가득 안고서 손님에게 복도 많은 옆집 여인 이야기를 해댔다. 아내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그 손님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우리 집도 그래, 남편이 요리하는 걸 참 좋아하거든.” 이날 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결혼 후에 나는 냉장고가 두 대로 늘었다. 싱글 사나이의 텅 빈 냉장고가, 아내 될 여인의 심금을 그리도 울렸던 것일까? 아내는 대형 냉장고를 두 대씩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득히 음식을 채워놓고서 손님을 청해서 음식 대접하기를 즐긴다. 사실 라면 끊이는 솜씨는 내가 아내보다 낫다. 처음과 중간의 불 조절, 라면을 한 번 휘젓는 그 시기와 계란을 푸는 모멘텀이 라면 맛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부엌에는 잘 안 들어간다. 그곳이야말로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고 자신만만하게 보이는 장소가 아닌가. 나 같은 남자들은 음식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못하는 척 할 뿐이다. 해야 할 기회가 오면 여자보다 더 잘 할 수도 있다. 엊그제 식당에 갔더니 한쪽 테이블에 나이 드신 부인네들이 앉아서 그 자리에 없는 남편들을 향해 떵떵 잘난 척을 해댔다. “얘, 남편들이 나이들수록 우리한테 잘하는 거 왜 그런는 줄아니? 나중에 따뜻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결국 마누라한테 잘 보여 둬야 하거든.” 그 옆의 친구인 듯한 여인이 말을 받았다. “그럼 그럼. 마누라 없어봐라, 누가 찌개 한 숟갈이라도 끓여줄까봐? 호호호, 깔깔깔.” 무엇이라고? 밥? 찌개? 밥은 전기 밥솥에 하면 되지, 찌개는 잡탕찌개가 일품인 거 모르시는가! 다만, 못하는 척할 뿐인데.......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