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소유욕 얽매여
삶의 기쁨·여유 놓쳐
소유욕에서 벗아날 때
세상의 행복감 느껴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온다.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갈 때도 역시 빈손으로 간다. 그런데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질시와 미움과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어 왔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근저에는 항상 소유욕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그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살다보면 필요한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더욱이 문명과 상품경제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자고 나면 쏟아지는 게 더 편리하고 새로운 물건들이라, 아무리 검소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를 외면하고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쉽지 않다’는 이유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상가들이 전세계적인 추앙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무소유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간디’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정신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간디가 회의차 비행기를 타고 타 지역에 가기 위해 공항에 갔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간디의 소지품을 검색하려 하자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곤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 그릇과 염소젖 한 통, 그리고 허름한 담요 여섯 장과 수건뿐이요.”
세상 사람들이 알다시피 간디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비폭력 평화주의자이자 무소유 사상가이다. 그는 비록 사적인 재산이라곤 하나 없이 떠들며 고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빛나는 이름은 지금도 전세계 많은 후세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구원할 정신적 힘으로 여겨져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실천을 좇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유욕에 얽매여 있고, 삶의 기쁨과 여유를 놓치기 십상이다.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흠집을 내고 상처를 주고 피를 흘리는 싸움이 반복되고 있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인생을 저당잡힌 채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의 ‘야만적 욕심’ 은 어찌 보면 동물보다 더 하다. 야생동물은 필요한 것 외에는 취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만 사냥하고 목이 마를 때만 물을 먹는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배를 부른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차지하고 축척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설령 자기가 취한 것이 나중에 쓰레기로 변하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 역시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는 삶을 살아 왔으나, 하지만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수록 모든 욕심과 집착이 그저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그래거 간디와 간디가 살았던 무소유의 삶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욕심과 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오히려 서로를 돕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며 살았다. 당장 나만 봐도 그렇다. 수십 년 전 막 개업을 했을 당시 찾아오는 환자가 별로 없어 다달이 내야할 이자와 원금에 허덕일 때는 없어도 남을 돌볼 줄 아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원래 욕심이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는 탐욕에서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나는 빈손으로 갈 것이다. 물론 그때는 욕심도 싹 비워져 수정처럼 맑은 심성만 남을 것이다. 이제야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볍다. 소유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세상이 가득 차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행복감이 더욱 두터워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