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이 김동순 교수께서 타계하신지 2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96년 12월 12일 선종하셨다. 김동순 교수께서는 1920년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에서 태어나시어 예산 농업학교를 졸업하시고 1941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시어 1944년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시었다.
김동순 교수께서는 졸업과 동시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서 조수로 근무하시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아직 정부수립도 안되고, 정부조직이 구성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철수한 대학을 지키고 학생들의 교육을 수행해 오신 여러 선배 교수님들 중의 한 분이시었다.
그 당시 아직 정부수립이 되지 않아 재정적인 여건도 원활치 않은데도 무급으로 대학을 계속 지키신 선배교수님들의 노고에 항시 감사 드린다.
김동순 교수님께서는 졸업 하시자마자 무급조수(무급조교)로 계시면서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된 후 대학원에 입학하시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교실에서 수학하시고 병리학 전공의 의학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김동순 교수는 1958년 미국 알라바마(Alabama) 치과대학 구강병리학교실 Robbinson 교수 밑에서 1년간 수학하시고 귀국하시면서 구강병리학 슬라이드 3000매를 가지고 오셔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구강 내 질환에 대한 시청각교육을 시작하시었고 현대 구강병리학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김동순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열강이시었다. 그 당시 교수님들의 강의는 Textbook도 없이 교수님들이 노트를 읽어주는 말을 받아쓰는 수준의 강의였는데, 유독 김동순 교수님의 강의는 불러주는 강의가 아니라 환등기로 비쳐주는 Slide 설명과 구연으로, 학생들은 교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면서 강의를 듣는 독특한 강의였다.
또 대학원생들의 논문지도도 각별하시었다. 대학원생들이 논문을 작성하고도 교열을 받고자 원고를 지도교수에게 가져가면 원고지가 붉은 색으로 물들여지고 여러 군데에 지적을 받고 수정을 받은 후에야 논문을 잡지에 게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한 것은 내가 1957년 서울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서울 외곽에 있는 공과대학, 농과대학, 상과대학의 신입생들을 제외한 서울대학교 전 신입생이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대강당에 집합하여 교수님들로부터 학교에 대한 소개와 활동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때, 교무처장 되시는 분의 말씀이 있으신 다음 치과대학 학생과장으로 계신 김동순 교수님이 등단 하셨다. 그 당시 김 교수님께서 1000여명이 넘는 신입생들 앞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학생들을 웃기시면서 말씀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가끔 말씀 하시면서 학생들의 배꼽을 잡고 웃기시면서 참 명강의를 하시어 대학생이 된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긍지를 갖게 하신 기억이 난다.
김동순 교수님께서는 치과대학에서 학생과장((1952~1958년)을 역임하시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치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셨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치과대학에는 전임교수가 1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김 교수님이 학장에 취임하시자마자 교수 충원에 힘쓰시어 학장 재임기간에 7, 8명의 전임교수 TO를 배정받아 급격히 각 전공에 전임교수를 두게 되었다. 우선 치과약리학교실을 신설하고 의과대학 약리학교실에 파견되어 있던 정동균 선생에게 전임강사 직위를 주어 근무케 하시고, 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신 김명국 선생을 구강해부학에 전임강사로 임명하시어 구강조직학(Oral histology)만 있던 구강해부학교실에 육안해부학(Gross anatomy) 전공교수를 두어 명실상부한 구강해부학교실이 되었다. 이외에도 치과교정학교실, 치주과학교실, 소아치과학교실에도 교수를 충원하였다.
내가 전공하고 있는 구강병리학교실에도 조한국 선생을 전임강사에 발령하시어 김동순 교수님과 조한국 전임강사 두 분의 전임교수를 갖게 되어 학장 업무에 바쁘신 김동순 교수님의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또 구강미생물학교실을 신설 하고저 나와 같이 구강병리학 석사과정에 있는 조기호 선생을 유급조교로 발령하여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기용숙 교수 밑에서 수학하게 하시였다.
1962년도에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각 분과학회가 새로 구성되면서 김 교수님께서는 구강병리학회의 필요성을 느끼시고 얼마 안 되는 구강병리학 대학원생들과 구강병리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타 전공 치과의사들과 대학원생들을 규합하여 대한구강병리학회를 1962년 9월 13일 창립하셨다. 초대회장에는 김동순 교수가 선출되시고 부회장에는 서울대학교병원 치과과장으로 계시던 김유환 교수를 모시게 되었다. 총무에는 조한국 선생님과 학술에는 조영필, 편집에는 전동진, 간사에는 조기호, 임창윤 등 실제 구강병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로 구성되었다.
이 때 총무로 계시던 조한국 교수가 사실상 학회 전부를 총괄하시고 모든 기록도 조한국 교수께서 집대성하여 회무 일지를 작성하였다. 그 당시는 한글타자기나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어서 전부 수기로 회무를 작성하였다. 학회는 1년에 한번 개최하였고, 한 달에 1번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가끔 미 8군에서 군의관들이 연자로 나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다.
김동순 교수님은 예절의 고향인 충청남도에서 태어나시어 유교사상이 남달리 강하시어 우리들이 타인과의 대화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교수님의 남을 배려하는 모습은 우리 후학들에게 종종 감명을 주시었다.
한 예로 우리들이 남들과 악수를 나눌 때에 아랫사람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이 먼저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 밀 때 아랫사람이 손을 내 미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먼저 윗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은 실례라든가, 제자가 어떤 외국 손님을 인솔하고 와서 자기 교수에게 인사를 시킬 때에 내방하는 객을 인솔자가 먼저 주인에게 소개를 시키는 것이 순서이지 주인을 내방자에게 먼저 인사키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동순 교수님께서 우리들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나가는데 예의범절과 품위를 지켜 나가는데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어 지금도 우리들이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김 교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교직자로서 스승의 도리와 교직자로서의 지켜야 할 품위와 도리, 스승과 제자사이의 지켜야 할 도리 등을 일깨워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이 있기까지는 우리들의 선배님들이 일구어 놓은 바탕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전공분야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의 형성과정과 그 과정에 관여하였던 우리 선배님들의 업적을 늘 잊지 않아야겠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 분야의 기초를 닦으신 김동순 교수님의 업적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숭모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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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치의학, 구강병리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