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여수에 가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제안을 받았다. 연말이라 분주했지만 ‘놀자’는 청에 응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겠다고 말했다. 일상적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던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떠나는 여정인지라 미묘한 설렘도 느껴졌다. 미끄러져서 조금 발을 접질려 서리병아리처럼 추레하게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흔흔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눈에 덮인 산하가 눈에 들어왔다. 비어 있기에 더욱 충만만 빈 들에도, 서부렁한 겨울 숲에도 흰 눈의 은총이 내려 앉아 있었다. 눈 덮인 바깥 세상을 보며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1565년)도 떠올렸다. 저 멀리 가파르게 솟구친 설산이 보이고,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앉아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나와 겨울을 즐기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사람들, 팽이치기 하는 아이들, 썰매를 끌어주는 사람들, 집 가까운 곳에서 추위와 맞서듯 불을 지피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수확은 보잘 것 없다.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브뤼겔은 풍경 속에 녹아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유럽의 몇몇 도시들을 떠돌다 돌아왔을 때 만나는 이들마다 이구동성으로 묻는 질문이 있었다.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요?”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았어요?”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글쎄, 어디가 좋았던가?” 하며 뜸을 들이면 답답하다는 듯이 “그래도 마음에 가장 남는 곳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며 대답을 다그친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몇몇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실상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나 잘 아는 이가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들 말이다.이탈리아의 트레 폰타나 성당에서 나는 하얀 행주 같은 걸레를 들고 장의자를 닦고 또 닦는 노수녀의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본 적이 있다. 그의 걸레질은 기도였다. 시인 고진하는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가 빨고 또 빤 행주를 가지고 날마다 장독대의 항아리를 말갛게 닦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장독대야말로 어머니의 성소였다고 노래한다. 법고 소리를 듣고 싶어 산중에 있는 사찰을 찾아갔다가 깨끗하게 비질된 절 마당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파리의 뒷골목을 걷고 또 걷다가 다리쉼이라도 할겸 찾아 들어간 작은 예배당에서 블루진 차림의 중년 사내
가을 추(秋)는 벼 화(禾)자와 불 화(火)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볕에 말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는 말이다. ‘말의 우주’에서 우석영 선생은 그것을 뒤집어 곡식이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사태라고 푼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곡식 뿐인가? 사과도 감도 붉게 무르익고 있다. 익숙한 방문객처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이 찾아온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주여, 해시계들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오곡 무르익은 들판에 바람이 불어오게 하소서.//주여, 마지막 남은 열매들까지 익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열매들이 영글도록 재촉하시어/단맛 중의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교우 한분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사무실 창틀에 걸어놓았다. 일을 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창쪽을 바라볼 때마다 그 붉은 감 열매는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 또한 흐뭇한 미소로 응대했다. 채 두 주가 지나지 않았는데 딱딱하던 감이 홍시가 되었다. 무르익은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는데 곁님은 질크러지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채근한다. 그제서야 할 수
10여년 전, 붉은색으로 넘치던 광장이 이제는 노란색 물결로 일렁인다. 열광과 환희의 함성 대신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간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이 가슴에 단 노란 리본, 광장에 내건 깃발, 그리고 기억의 장소마다 붙여놓은 노란색 포스트잇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했다. 죽음을 예감한 이들이 절박하게 내민 손을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그저 버려진 것이었다. 그들은 잉여인간, 혹은 호모 세케르 취급을 받았다. 죽어간 이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식의 모습을 보았고, 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누구도 고통이라는 나라에서 이방인일 수 없다.분향소 앞,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색 깃발은 마치 죽어간 이들의 넋인 듯하여 나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돌아선 채 눈물을 훔쳤고, 또 어떤 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그러쥔 채 영정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애도의 물결을 막으려는 이들, 애도가 분노로 화하지 않을 방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저 펄럭이는 노란색 깃발은 공포 그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박두진의 ‘해야 솟아라’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이런 시구를 얻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새롭게 된 시간’이다. 누추하고 던적스러운 일상에 지친 이들은 시간이 새롭게 갱신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주기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마디를 만들었고, 새해도 그 마디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대형 건물에 내걸려 유명해진 반칠환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는 시간이 왜 위대한 갱신자인지를 이렇게 보여준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삶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새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당도한다. 하지만 새해가 되어 달력을 바꿔 걸고, 수첩을 바꾸고, 전화번호부를 정리해 보아도 삶이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삶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객관적으로 계측 가능한 시간인 크로노스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시간인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아무리
일주일에 하루, 새벽 기상 시간에 매이지 않기로 한 월요일 아침, 모처럼의 숙면을 꿈꿨지만 몸에 내장된 기억은 의지보다 강했다. 어김없이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침대 속에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가며 30분 쯤 뒹굴거리는 호사를 누렸다. 아내가 아침 6시만 되면 트는 FM 라디오 방송을 대신 틀고, 아침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지금 이곳이 참 낯설다’ 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존 레논의 ‘이매진’이었다.“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하려고만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죠. 저 아래 지옥이 없고, 저 위로 푸른 하늘만 있을 뿐.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죠. 죽일 일도 목숨을 바쳐야 할 일도 없고, 종교도 없을 거예요.”노래는 이어졌다. 존 레논이 달콤한 목소리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그건 나 혼자만의 꿈은 아니라고, 당신도 그 꿈에 동참하라고 말할 때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홉스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나날이다. 드라마틱한 일
뒤늦게 살림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자리에 누운 후, 30여 년간 거의 독점적으로 수행해오던 아내의 살림이 내 차지가 되었다. 아내는 허둥거리는 남편을 보며 옆에서 혀를 차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초보 주부이니 말이다. 바깥 일이 분주하다는 핑계 하에 청소나 설거지 등에만 한정했던 나의 역할이 확장되자 몸은 바빠졌지만 마음은 여러 모로 즐겁다.그동안 차려진 음식만 무심히 허겁지겁 먹던 처지인지라,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곤 한다. 신 김치를 활용해 찌개를 끓일 때 매실 엑기스나 설탕을 조금 가미해야 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나는 비의를 전수받는 도제처럼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찜기를 이용해 고구마를 삶거나 채소를 데칠 때 바닥 물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울 때에는 물을 조금 뿌려주어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도 배우고 있다. 상을 차릴 때도 찬 음식을 먼저 내놓고 그 후에 덥히거나 끓이는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는 것을 시행착오 끝에 익혔다.직접 상을 차리다보니 음식 먹음이 곧 하늘을 모시는 일임을 알 것 같았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은 ‘쌀 한 톨의 무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