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전화의 단점을모두 충족시켜주는 e-메일난 오늘도 컴퓨터 앞을 서성인다 소위 PC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은 어떤 경로 이든 e 메일을 하게 되어 있다. 직장이나 사업관계로 사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친지와도 하게 마련이다. 이제는 컴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돼 컴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컴의 노예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야흐로 컴은 생활에도 점점 파고들어 어느덧 필수가 돼 가고 있으며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모든 쇼핑을 하는데 에서도 또한 예약을 하는데에도 컴의 역할이 지대하다. 나의 경우는 처음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시집들을 올려 보라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홈페이지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을 찾아 돈을 내고 만들고 시집들을 올려놓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PC와 가까워지고 독자들이 내 홈피에 들어와 보고 글을 남기고 간 분들에 대한 답례의 글을 나 또한 e 메일로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고 어께 너머로 배운 것이어서 처음부터 엉망이다. 둘째 손가락으로 치는 독수리 타법이였다. 하기야 지금도 여전히 독수리 타법이지만 처음 보다야 속도가 좀 빨라졌을 뿐 큰 진전은 없고 이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실패도 후회도 없고앞날을 정확하게 내다 본다 지구가 생긴 이래 모든 동식물은 생존을 영위(營爲)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경험들을 토대로 보다 더 영리하게 생존경쟁에 대처해 왔다고 믿어진다.특히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수십만년전인 선사시대로 부터 다른 동식물보다도 더 뛰어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잘 살기 위하여 많은 머리를 썼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발전하고 또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 지구상의 만물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식물 보다도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또한 그 경험들을 잘 전수(傳受)하였기 때문일 것이다.경험에는 성공한 경험과 실패한 경험이 있고, 또 남의 경험과 내 경험이 있다. 작게는 개인의 경험이 있고 크게는 가족이나 부락, 단체나 국가의 경험도 있다. 모든 역사는 경험의 기록이며 모든 학문 또한 경험의 나열(羅列)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개인의 이력(履歷)이 곧 경험이요, 만들어 낸 모든 산물이 곧 경험의 열매다. 곤충이 D.D.T.에 면역이 생겨 죽지 않는 것도, 지진이나 해일(海溢)을 미리 아는 야생 동물들의 초능력도 모두 경험에 의한 생존 수단이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마음껏 한 곳에서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나무만 베어다 팔아도 전국민이 30년을 먹고 살수 있다는 축복의 땅 캐나다, 나라 인구수만큼 호수가 있다는 호수와 나무의 나라 캐나다. 올초부터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등을 가보고 싶어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요. 하지만 제가 간이 작아서 누구한테 업히지 않고는 혼자서 여행갈 용기가 없었지요.작년 미국갈 때도 영어 못 알아 듣는다고 스튜어디스한테 비상구 앞좌석에서 구석자리로 쫓겨나고, LA공항입국할 때에도 줄을 잘못 서서 2시간만에 꼴찌로 통관을 했었던 아픈기억이 있지요.그러다 보니 친구의 친구가 총 열흘동안을 우리를 위해서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해서 캐나다를 가게되었습니다. 일년중에 캐나다 관광의 최적기가 7월중순이라 합니다. 그때가 날씨도 제일 좋고, 가을을 넘어가면 록키산쪽은 눈이 많이 오고 기후가 너무 내려가서 실제 외국인이 관광하기에는 힘들어 진다고 하더군요. 제가 캐나다에 갔다왔다고 했을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나이아가라 폭포는 보고왔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캐나다가 나이아가라폭포의 나라로 알려져있지, 록키산맥의 나라로는 그렇게 많이 알
초보 운전자를 기분 좋게 끼어주고주차가 어려워 애쓰는 운전자를느긋하게 기다리는 ‘배려’가 생겼다 나는 13년 무사고 베테랑(?) 운전수다. 94년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거의 그런 일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운전자에 대한 남성운전자의 멸시가 도를 넘어섰던 때였다. 혹여 여자라고 업신여기기라도 할까봐 부러 객기를 부려가며 운전을 험히 하던 시절도 있었다. 95년 여름 어느 날 열심히 달리고 있는 나에게 어떤 젊은 남자운전자가 옆으로 다가와 무언가 말을 해왔다. ‘또 여자운전자를 업신여기는 게지’하며 무시하고 달리다가 신호에 걸려 대기하고 있는 나에게 그 사람이 다가와 다급히 하는 말은 뜻밖에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는 것이었다. 난 그 순간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는 사실보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사실조차 모르고 운전하는 초보라는 사실을 들켰다는 게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알아요!” 하며 시큰둥하게 내뱉고는 창문을 닫고 횡하니 와 버렸다. 그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애써 가르쳐준 그 운전자의 배려에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안하고 그렇게 와야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분에게 너무 미안하고 그랬던 내가 우습기만 하다
한 시간, 하루, 일년 등우리의 일상은도전의 연속이다 “큭 큭 큭” “하하하” “호호호” “으 ~흐흐흐” 환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 하지 말라고 TV를 켜 놓는데 근엄한 표정, 얌전한 표정, 새침한 표정, 불안한 표정, 즐거운 표정 등을 한 가지 표정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다.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여섯 남자들의 좌충우돌 도전기! 무한도전이다.다 큰 성인 남자들이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려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꾸밈없이 가식 없이 참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전’ 이라는 말은 참 씩씩하고 열정적이고 근사한 말인 것 같다.하지만 거대하고 위대해 보여서 아무 일에나 ‘도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미안하다. 생사를 넘어 로체샤르를 정복한 산악인 엄홍길 씨나,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희야 양이나, 여러 분야에서 힘든 고비를 넘기고 우뚝 선 사람들에게 ‘도전’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 도전의 연속이다.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좌절, 행복과 불행, 노력과 연습, 실천을 통해 얻어진 도전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저 위대
선배님들과의 30년 격차는열정과 진지함으로모두가 ‘하나’ 남과북도 ‘하나’ 9월 14일 (서울~온정인민병원) 서울에서 9시경 출발한 치교협 (상임대표:이병태)일행 29명(가족포함)은 하염없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오후 4시경 전용버스로 방북해 온정인민병원에 도착한 후 박순영 병원장의 안내를 받았다.병원 시설과 치과치료실, 보철실을 돌아보고 원장실에서 다과와 음료를 들면서 치과진료소 개소 2주년 및 보철실(우리의 기공실에 해당) 개설을 자축하며 그동안의 성과와 이번에 진료할 환자에 대해 토론했다. 잠시 후 우리는 병원 앞에서 간단한 기념촬영을 하고 북측 교예단의 공연관람을 하였으며, 1시간 30분동안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단원 25명이 고별인사를 하는 순간에 수백여 관중들이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는 동안 왠지 가슴뭉클 한 여운은 눈시울을 적신다. 하나됨을 느끼는 순간이었음이리라…. 공연 후 우리는 차창 밖으로 구룡마을과 불빛이 전혀 없는 양지마을을 대조적으로 감상하며 어둠을 헤치고 고성항구 끝에 우뚝 서 있는 숙소인 해금강 호텔로 향하였다.바닷가의 운치와 가로등은 우리를 또다른 낭만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친후
더 참되고 더 진실하고 더 낫게진화하고자 하는 소망이내 안에 있다 찻물을 끓인다. 한꺼번에 서너 가지 생각이 뒤엉켜 도무지 풀릴 기색이 안보이거나 스스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나는 가끔 홀로 찻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찻물이 끓는 동안 서둘러 머릿속을 송두리째 비워간다. 가을로 접어들어 선선해질 무렵이면 감잎차를 즐겨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감잎차의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 잘 만든 감잎차는 열탕으로 우릴 때 그 은은하고 다정한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오직 나만을 만난다. 스스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피로로 지친 몸을 쓰다듬어주고 상한 마음도 달래준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해 간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동안 마음은 다시 평온해지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다시 건강해짐을 느낀다.나는 따로 시간을 정해 기도하거나 명상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차를 마시면서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갖고 나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비록 내가 선택한 길이 좁고 험난한 길일지라도, 그 길은 내가 가야할 길임이 더욱 분명해지곤 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자기가 어느 곳에 있든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한 여름 불볕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 가을의 초입에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져 수확을 재촉하는 쨍한 금속성의 가을 햇볕을 고대하던 온갖 것들을 물에 가둬버렸다.유독 요즘 들어 겨울이 겨울답지 못하고,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각 계절이 저 답지 못함이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살아지는 건지도 모르고 사는 나를 여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지난 일요일 아버님 산소에 벌초를 하기위해 고향에 가던 중 벌초 후 사용할 제초제를 사러 들렀던 조그만 시골 농약사에서 아무 생각없이 눈길이 간 작은 칠판위에 적힌 글귀하나. 隨處作主 入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어느 곳에 있던지 주인이 되라, 서 있는 것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로 자기가 어느 곳에 있든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뜻 으로 중국 당대의 스님 임제선사의 말씀이다. 뭔가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글씨만 바라보다 머쓱해져 그저 주인이 들려 주는 대로 제초제봉지를 들고 나왔다.내 나름대로 한때 그 또한 하나의 화두라 생각하며 열심히 되뇌었던 글귀였건만… 잊고 살았던
안정을 뒤로하고변화를 위해 새로운 선택을 하는노력과 용기에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하는 작은 선택부터 크게는 어떤 일을 천직으로 삼을 것인가, 누구를 배우자로 선택할 것인가 등 우리는 지금껏 무수한 선택을 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진로변경은 내 인생에서 지금까진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시기에 우리나라는 IMF라는 위기를 맞았고 졸업을 앞둔 사회 초년생들은 취업난을 겪었다. 가뜩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을 졸업에 즈음하여 나는 더더욱 진로선택의 어려움을 느꼈다. 어떻게든 취업을 위해 노력해 봐야할지, 전공공부를 더 심도 있게 해서 나의 경쟁력을 높여야 할지, 이도저도 아니면 지금가고 있는 나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야 할지 하는 고민을 한층 더 심각하게 하게 되었다. 당시에 공학도였던 나는 대학 4년간 나의 전공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갖지 못했었기에, 종종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나는 아직도 내가 무얼 해야 좋을지 잘 모르
감성과 이성이 더 굳기전에내 생각 반대편에 있는 것을한번 마음으로 껴 안아봐야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일까?” 초등학생 일기장속의 한 문구처럼 여름장마보다 더 장마 같은 가을비가 계속되고 있다. 수자원공사에게는 효자비이겠지만, 결실을 맺어야 하는 가을 들녘을 바라보는 농림부에게는 원망스런 불효자일 수밖에 없는 이 가을비를 바라보는 마음들이 각기 다르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 달여 이상 국민들의 마음을 애타게 했던 인질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어떤 이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국세를 축낸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시위를 했다. 곧 다가올 세금납부일을 체크하며 우리가 이렇게 애써 낸 혈세를 명분없는 일을 위해 썼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도 치민다. 나도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비용을 배상하라고 항의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얼마 전에 만난 친구의 말을 떠올려 본다. 싸움터에서 매를 맞고 온 아이에게 왜 그 자리에 있어서 맞고 왔느냐고 야단을 치는 게 맞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던… 또 우리의 지난 과거를 생각해 보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땅에 와서 고난한 삶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보다 풍성하게 해준 많은
가르킨다는 것 보다선배로서 먼저 안 것에 대해후배들과 같이 나누고 싶다 어릴적 내 꿈은 야무지게도 한국의 페스탈로찌가 되는 것이였고, 꿈을 좀 더 현실적으로 갖게 되었을 때에 나는 중·고등학교 음악선생이 되길 희망하였다. 지금 나는 참 행복하게도 음악선생은 아니지만 내 어릴적 꿈인 선생노릇을 하고 있고, 벌써 1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2000명이 넘는 제자를 가지게 되었고, 병원 방문을 하다보면 “교수님, 저 누구예요”하며 달려와 반가이 인사하는 제자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초임교수시절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놓으려 했고,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욕심이 넘쳐 기대에 어긋난 학생에게는 눈물 나도록 야단을 쳤고 칭찬은 지독히도 인색하였으며 원칙을 중요시하고 예외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보다는 내 방식대로 끌고 가려했고 특히 환자를 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늘 학생들에게 무섭고 카리스마 있는 교수라는 평가를 받곤 하였다.이런 나에게 춤추는 것이 학과 공부보다도 좋았던 한 학생과의 만남은 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