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간 ‘동거 ’를 통해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준 아버지아버지는 지금도 내안에 살아 계신다 치과의사들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5점 만점에 3점 이하로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주기를 희망하는 치과의사들이 많은 것을 보면 선망받는 직업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나 역시 그렇게 치과의사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내 고향 강화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니 아버지의 페이닥터로 치과인생이 시작되었다. 본과 2학년 때였던가 치과개원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둔 개업을 앞둔 선배의 단호한 한마디가 그 후로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니?" 치과원장으로서 보다는 강화의 원로로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던 아버지와의 개원생활에 적응하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환자들이 몰려도 꿋꿋이 전치부 6-unit 브릿지를 제거하시고는 ‘Lunch!" 한마디를 던지고 나가시는 뒷모습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레진 템퍼러리 브릿지를 만들며 점심을 건너뛰어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런치"와 등가의 단어들, ‘배쓰룸", ‘바버숍? 등은 그때의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함께 공감하고 호흡하며열정적인 땀을 흘리며시합하는 그 순간이 소중하다 둥그런 공만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던지고 깨고 두드리던 한 꼬마녀석이 있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도 가기 전부터 고무공을 가지고 동네에서 야구랍시고 들이대던 그 녀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반 친구 녀석들과 야구부라는 것을 만들어서 (7명 뿐이었다) 다른 반 아이들과 시합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공도 고무공이 아닌 단단한 공으로… 포수 마스크도 없이 다치기도 많이 다쳤지만 이 녀석들은 지칠 줄을 몰랐고, 어둠이 내릴 때 까지 시합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패배를 몰랐던 독수리 야구단. 마치 하늘을 날며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가 된 기분이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982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탄생한 최초 원년(元年)이기 때문이다. 그해 각 도시의 야구장을 수놓던 OB와 삼성, 해태와 MBC, 롯데와 삼미의 펄럭이던 깃발과, 3루를 힘차게 돌아 귀환하던 선수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오던 파울 볼과, 숨 죽여 가며 지켜보던 불펜의 피칭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신세계였다. 그날로 난 해태타이거즈의 초대
사진은 여과 없이내 모습을 드러내주는거울과 같은 존재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을 입학하고 사진기를 잡은 지도 벌써 만 6년째,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컨대, 학교를 다니면서 남는 많은 공강시간에 나에게 잘 맞는 취미를 찾은 것이 사진 같기도 하다. 특별히 하고 싶었던 마음이나 애착이 가진 않았지만, 평소에 회화나 데생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자연스러웠고, 즐거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는 점이나, 사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시작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셔터스피드, 조리개수치, ISO감도, 심도, 온갖 사진의 법칙, 인화, 닷징과 버닝, 확대기… 나에게 익숙한 단어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으며, 모든 정보는 인터넷과 동호회, 서적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허무하게 날려버린 필름도 수 십, 수백 통. 버린 시간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힘들게 시작한 사진이 이제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일 뿐더러, 또 하나의 나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누군가 사진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에게서 내 삶의 일부를 빼앗아 가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린
환자에 최선을 다하고제자들에게 솔선수범 하시며치과의사의 표상을 남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중순에 갑작스럽게 일본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경치대의 명예교수이신 다카하시 쇼지로 (高橋庄二郞) 교수님의 부음을 알리는 전화이었다. 다카하시 쇼지로 교수님은 일본 구강악안면외과학계의 거목으로 그 업적과 고매한 인격으로 존경을 받아오던 분으로, 지난 해 6월에 일본학회 참석 차 동경에 갔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입원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을 때에는 암 수술을 받고 난 직후였다.수술 뒤끝이라 야위고 허약하신 모습이었지만 투병의 어려움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국의 제자에게 오히려 안부를 물으시던 노 교수님을 뵙고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그 때가 마지막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23년 전인 1984년에 일본으로 유학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만 했던 그 당시의 출국수속관계 등 세심한데 까지 신경을 써 주셔 큰 어려움 없이 동경치대로 갈 수 있게 배려해 주셨고 체재기간 중 수술도 가능하게 해주시고, 연구자료 등을 챙겨주시며 가르쳐 주셨던 다카하시 교수님이 계셨기에 당시 젊은 필자로서는 교수로서의 기본적
경찰병원 인턴 애송이 시절, 한 오십대 남성이 윗입술과 인중부위가 잔뜩 부어서 내원했다. 한창 겁 없이 배우던 시절이라, 치근단 농양으로 진단하고는 기회라 생각하고 바로 절개, 배농 시술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다음날 출근하니 지난 밤 응급실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출혈이 멎지 않는다고 치과인턴을 콜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과장님이 직접 가셔서 응급처치를 하셨다고 한다. 혈액검사 결과 혈소판 수치에 문제가 있어 내과로 응급 입원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불안했다. 며칠 후 환자 가족들이 치과로 몰려왔다. 경험 없는 인턴이 잘못해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잠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과장님이 “인턴이 치과에서 절개를 한 덕분에 그간 모르고 있었던 백혈병이 발견되었는데 감사하지 못할망정 무슨 소리냐”며 의연히 나서자 간신히 진정되었다. (환자는 내과에서 thrombocytopenia로 판명되었다) 변 과장님이 따로 조용히 부르시더니, “ 닥터 박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으니 걱정 말게.” 긴장하고 의기소침해 있던 나를 격려해 주셨다. 과장님은 지금도 대전 을지병원에서 정정히 환자를 보고 계신데, 항상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어쨌든 큰일을
항상 젊음이 있고항상 봄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후회 없는 노후를 위해 준비하자 앞만 바라보고 살다가 어느날 문득 사십 중반을 맞이하다 보니 점차 변화된 내 자신을 보고 “이제 이렇게 살다가 쉰, 예순을 맞이하며 노후를 맞이해야 하나” 생각이 든다. 특별하게 뭐 이룩해 놓은 것도 없어서인지 은퇴를 고려해야 하는 나이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느껴본다. 사십을 넘으면 이제 청년이 아닌 중년으로 사회에서 책임질 나이로 변해간다. ‘책임을 져야하는 한다’라는 말뜻이 나이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과 후배들과의 모임에서도 주책없이 행동을 할 수도 없고 마냥 히히덕 거리며 철없이 행동하기도 눈치 보이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몸도 팔팔한 20~30대가 아니다보니 여기저기서 아픈 증상과 성인병들이 하나 둘씩 찾아오는 나이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나이다. 그래서 죽음과는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주변에서 왜 그렇게 곡(曲)소리들이 많은지….부모님들이 세상을 달리하는 부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음은 너희들 차례라는 신호음인가?이제 개원 15년을 넘기다 보니 환자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공간이젠 집보다 더 편안한 곳병원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공간 우리 집은 분당이다.병원은 인천이다. 병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50킬로미터다.집을 나와 병원 원장실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10분이다.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자명종 시계는 자취를 감추고 핸드폰의 알람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 왔다. 눈을 뜨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오늘도 비가 많이 오는구나. 난 원래 비를 좋아한다. 하지만 출근길의 비는 영 반갑지가 않다. 그래도 다른 날보다 서둘러 일찍 출발했다. 아파트 입구를 나오자 마자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가 나를 맞는다.겨우겨우 주차장이 된 도로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이젠 그래도 달릴만 하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와이퍼를 아무리 빨리 작동시켜도 시계가 좋지 않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달리면서 시계를 본다. 오늘은 아무래도 제시간에 도착하긴 힘들겠군.매일 하루에 두 시간씩 일년이면 700시간 정도를 나는 출퇴근에 소비한다. 본래 미묘한 숫자놀이에 흥미가 있다 보니 이런 계산을 자주 하게 된다. 애들 교육을 주장하는 마나님 때문에 분당으로 이사 온지 어느새 5
욕심을 버려 마음을 맑게 하면마음의 눈이 밝아져자연이 전하는 진실을 알게 된다 여름의 한복판 8월의 첫째 날 집사람과 나는 두바퀴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응봉언덕에 선다. 5년전만해도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던 나였다.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으로 그 좋아하던 등산도 접은채 방황하던 나는 어느 의사의 권유로 만난 것이 자전거였다. 이제는 자전거 덕분으로 100km도 거뜬히 이겨낼 근력과 건강을 되찾았다. 나에게 보약 역할을 했던 자전거는 이제 나를 자연이라는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지금까지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솟구쳤고, 대자연을 접하면서 앞만보고 질주했던 속된 욕심과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수와 진실! 자연이 나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오늘은 여름의 탄천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용인구성면 법화산(385m)에서 발원한 탄천은 그 옛날 뚝섬에 부려놓은 목재를 배에 싣고 옮겨 숯을 굽던 곳. 그래서 물이 시커멓게 흐른다고 해서 ‘숯내’라고 불렀다.몇주 전에 바이콜릭스가 완주한 아름답기 그지없는곳, 기흥까지 왕복거리가 60km에 이르는 자연의 서사시가 펼쳐지는 곳이다. 응봉의 언덕을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를 보면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한국의 민중을 보는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파트 전면에 펼쳐진 숲의 호수 엄광산을 바라본다.오! 엽록소의 축복을 받은 초록의 지구, 그리고 겨울나무.초등학교 시절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라다보는 세상은 참으로 색달랐다.나무 타기는 좋은 운동이다.예과시절, 서울 문리대의 마로니에는 한국의 몇 그루 안 되는 유럽의 순례자였다.요즘은 서초구에서 활기찬 가로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처녀시절의 아내에게 마로니에 꽃을 편지지에 그려 보낸 적이 있다. 35년 전 이야기이다.이양화 연세대교수의 수필 ‘신록예찬’을 모두 기억하리라. 젊은 날 성균관대학교 언덕에서 바라 본 비원 숲의 찬란한 신록은 최고의 파스텔톤 색조로 지금도 천국처럼 떠오른다. 대학 시절 만나면 반가웠던 성균관대학교 문묘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장성한 딸들과 함께 찾아본다. 기품이 높은 30여년 지기. 모두 변해갔으나, 그는 여전히 젊다.서울 서초동 법조청사 10차선 대로변 중앙에 서 있는 나무. 단종의 매형이 그 나무를 지나며 단종 걱정을 했다는 나이 많은 향나무. 한적한 한양 변두리가 강남대로 중심으로 바뀌어도 독야청청이다. 달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더불어 살아가고 싶습니다그것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이룹니다 행복하게 살자 - 이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행복이란 단어에는 참 많은 뜻이 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치과의 응대멘트 역시 ‘행복한 이홈 치과’입니다. 여기에서의 행복하다는 말은 원장의 행복, 그리고 직원들의 행복. 그리고 병원 전체의 행복. 이 행복한 기운을 찾아오시는 환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행복에 있어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첫째로 주변 가족들의 건강이 있어야겠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평화가 있어야 할 것이며 삶에서 찾아오는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치과대학 본과 3학년 때 아버지께서 갑작스런 갑상선암 선고를 받으시고 목 주변의 임파선을 포함한 조직들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이후로 건강이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크게 가졌습니다. 만일 제가 큰 병에 걸려 아프다거나 한다면 그것은 저만의 고통이 아니라 저를 사랑해주는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가족들에게 역시 고통일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뒤를 돌아보는 법이다인생만큼 먼 길이 어디있겠는가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땡볕 무더위가 시작됐다. 환자들을 정신없이 진료하고 있으면 등줄기에서 땀이 흠씬 흘러내린다. 이무렵쯤이면 무더위만큼나 힘들었던 인턴시절 절대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 한 분이 떠오른다.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날 정도로 분주했다. 호명과 함께 등장한 할아버지의 범상치 않은 출현은 주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삿갓에 도포를 두르고 지팡이에 온 몸을 의지하며 겨우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란 것은 할아버지의 연세였다. 출생년도 1901년, 그 해로 정확히 100세…. 하지만 할아버지는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에 오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치수검사을 위해 할아버지의 틀니를 빼고 이런 저런 검사를 하던 중에 장난끼가 발동하여 대뜸 질문을 드려보았다. “할아버지, 혹시 관순이 누나 알아요?"“엥, 누구 말이여? 관순이가 뉘귀여?"“아 왜 유관순 누나 있잖아요…. 삼일운동 때 만세운동한 유관순 누나요." “도통 뭔소린지… 내가 아는 사람이여? 유관순이 나 몰라."“할아버지 그럼 삼일운동은 기억하세요?"“그 때 너나없이 만세부르면서 정신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