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축복의 중심에 서 있던 시간들이내겐 평생 함께 할 소중한 추억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9년은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불시에 찾아온 질병으로 인해 거의 1년을 누워있다시피 했던 때였으며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을 하면 바로 해외여행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병마와도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정말 여행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기회만 있으면 출국을 위해 병역미필자가 갖추어야 할 수 많은 서류들을 중간고사를 치르기도 전부터 준비를 해서 가능하면 다양한 여행을 하려고 노력했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었고 여행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과 경험들을 축적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렇게 모여진 여행 기술들이 빛을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고려대학교 임상치의학대학원 구강외과 전공으로 석사과정에 재학하고 있던 2002년, 고대구로병원의 임재석 교수님께서 이집트로 구순구개열 환자를 위한 해외 수술 봉사를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는
우리의 힘으로진주의 역사문화를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지난 1월 12일과 5월 19일 경남일보의 강동욱 기자가 진주대첩 ‘김시민장군 공신교서’가 일본미술관에 뺏길 위기가 있다는 기사와 5월 25일 중앙일보 김상진 기자가 쓴 정부 `절차 타령’하다 못 샀다 김시민 장군 임진란 `공신교서’ 일본서 경매 ‘보물급’일본인에 넘어갈 듯하다는 기사에다, 선조는 1604년 김시민을 선무(宣武) 2등 공신에 올리고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이 교서가 일제 때 일본인 학자에게 넘어갔다가 작년 말 도쿄 경매시장에서 고서적상에게 1천2백만엔에 낙찰되면서 모처럼 소재를 드러냈다. 진주정신의 상징 김시민 공신교서를 그대로 둘 진주 사람들이 아니다.시민단체들이 모금운동을 벌이고 민속예술단체들도 모금공연에 나서 교서를 되사오기로 했다. 충절(忠節)의 고장,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 진주의 곧은 얼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김시민교서의 얄궂은 운명을 종내 바로잡으리라 믿는다는 5월 25일의 조선일보 ‘만물상’을 잇달아 접한 진주시민은 진주대첩의 역사기록인 김시민장군의 공신교서가 일본에서 100년에 가까운 유배를 끝내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야 한다는 결심을 하는데 촉매역
푸른 자구리 바다의더디게 흘러가는 ‘시계’처럼상생하는 사회를 꿈꾼다 이래저래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귀포시 보건소 공중보건치과의사로 근무한지 벌써 2년반이 지난 것 같다. 처음 배치 받은 날은 차(코란도)에 이삿짐을 한가득 싣고 제주항에서 출발해 잘 알지도 못하는 촌놈이 서귀포까지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5·16도로를 탔다. 제주도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5·16도로는 군사정권시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만들어진 도로란다. 그 험준함을 보면 정말 그 때 그 시절이니까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고 또 짜증이 난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짐을 잔뜩 실은 내 차는 참 거북이처럼 더듬더듬 올라갔다. 차가 뒤집힐 것 같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겨우 넘었다. 지금이야 이 도로를 거짓말 좀 많이 보태면 ‘initial D’에 나오는 다운힐 경주차량처럼 끼기긱 거리면서 5·16 택시들과 맞짱뜨면서 다니고, 저번 겨울에는 그 도로에서 360도 회전 비스무레한 드리프트도 해보았다.(안죽은게 기적이다.) 4월 아직 추운 때 관사에 누워서 자고 있으려니 잠은 안오고 참 추적추적했다. 그러다 잠들었는데 한 두어시간 잤을까 갑자기 허벅지가 엄청 아프면서 정말 자다가 “악” 소
세계 11위 경제 대국이지구촌 이웃을 돌보는데인색하지 않았나 반성하며 8월이 끝나갈 무렵 몽골은 가을이었다. 청명하고 높은 하늘은 우리나라의 시월에 가까웠고 진료봉사를 위하여 방문한 지역, 그 광활한 초원과 낮은 구름은 나의 마음을 넓게 하였다. 학기 중엔 쉴 틈 없는 수업과 실습, 시험에 쫓기며, 치과대학 속에서의 나만을 느끼다가 드넓은 세계와의 만남은 나 뿐만 아니라 함께 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대학원 28명 모두의 마음을 새롭게 했던 것 같다. 김태우 교수님과 수련의 선생님들의 휴가기간을 감안하여 4박5일의 일정으로 진료 기간은 총 3일 이었는데, 현지 선교사님의 가이드에 따라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1시간 이내 거리의 서로 다른 교회를 방문하며 매일 150명 내외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출발 전 준비모임에서 모든 멤버들이 늘 기도하던 것 중 하나가 ‘겸손함’이었다. 치료의 시혜를 베푼다는 생각을 하고 가면 교만해져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없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의 준비 때문이었는지 몽골의 사람들이 친구처럼, 동네 어른처럼 느껴졌다. 순박한 몽골사람들은 일반의사에 비해 만나기 어려운 치과의사들을 만났다고, 무
정상인에서 장애인으로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내 인생이 달라지고 있다 어? 지금 여기가 어디지? 내가 죽은 거야? 살아 있는 거야?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아차 그렇지’, 트럭 운전사와 눈이 마주친 건 기억이 나는데,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꿈결 같은 시간이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정확하지도 않은 채,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자마자 손부터 살펴보았다. 일단 손만 멀쩡하면 치과의사 노릇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니지 손은 멀쩡한데 하반신 마비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목을 아주 조심스럽게 돌려보니 ‘어 이거봐라’ 괜찮네. 다음은 허리 ‘으음 괜찮군’. 이제 다리만 괜찮으면 되는데. 어라 오른쪽 다리가 안 움직이네, 내려다보니 바지를 뚫고나와 있는 허연 나의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내가 치과의사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다리를 자른다면 의족을 해야 할 텐데.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구급차가 왔고, 그로부터 일년 반에 걸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 답답하던 병원생활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잠시 퇴원해서 집에 와 있으면 그리 행복하고, 다시 입원하고. 그러면서도
사랑과 감동을 주는아름다운 삶은 타인도 살리고자신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맨 땅에서조차 땀을 자아낼 것만 같던 강렬한 햇볕도 이젠 기세가 꺾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에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不惑은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不惑을 뒤로하고 보니 육체는 점점 안정감이 떨어지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이런 낌새를 모를 리 없는 아내는 아침과 저녁으로 피로회복을 위한 나름의 처방을 내밀곤 한다. 무얼 더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지는 않으련만 그저 당장은 손쉬운 방법이기에 일말의 기대감으로 받아든다. 어떤 것이 건강한 삶일까? 건강이라 하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전한 상태를 말하고 혹자는 여기에 영적인 건강까지도 덧붙이곤 한다. 오늘 교회 목사님의 설교 때문인지 아니면 사색의 계절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과연 내가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운동과 적당한 음식섭취가 필수인데 이 방면에서는 거의 낙제점이다. 불규칙한 식사시간과 폭식, 운동할 시간은 일과 중 어느 곳에 끼워 넣을 지 마땅치가 않다. 아마도 바쁜 직장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리라. 예전에 중요한 일을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나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 없고주변 사람이 더 편안해졌으면… 4~5년전 내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 한 분과 술자리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끝까지 내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선배는 네가 나이 50이 되면 다시 얘기 하자고 했다.올해 나는 한국 나이로 50이 되었다. 그 선배가 말한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나이 50은 지천명이라고 해서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 했지만 언감생심이고,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입에서는 뱅뱅 돌지만 밖으로 내뱉는 말의 양이 줄어들게 된 것 같고, 그러다보니 상대방의 이야기를 예전보다 더 많이 듣게 된 것 같고, 그러다보니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를 더 헤아리게 된 것 같고, 그러다보니 말을 더 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밀어 붙여서 성사되어야 속이 시원했고, 안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관철시키려 했던 것이 이제는 돌아가는 추세를 더 많이 관철하게 되었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내가 주도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서는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알게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만직업이 직업이니만큼앞서 가는 눈을 붙잡고 싶다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것은 할 말은 아끼고 대신 더 많이 들으라는 것이라던데 그럼 눈이 두개인 것은 뭔뜻?하나면 도깨비와 구별이 안 되어서? 아니면 좌우 다 보라고?나이 들면서 눈과 귀가 나빠지는 것은, 세상사를 꼬장꼬장하게 보지 말고 대충 보고 들어 느긋한 인생의 모습을 띄게 하는 자연의 섭리라고 선인들은 말씀하셨지만…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럴 수 없으니 먼저 앞서 가는 눈을 붙잡고 싶다. 나, 중학생때 할머니께서 손발톱 잘라 달라 하시던 것을 그 땐 이해 못했었네.나, 고등학생때 아버지께서 쓰시던 커다란 수첩을 그 땐 이해 못했었네.나, 대학생때 교수님께서 안경 두개를 바꿔 가며 쓰시던 것을 그 땐 이해 못했었네. 나, 처음 개원하고서 치료받으러 오는 어르신들의 입 주변에 남은 음식 흔적을 그 땐 이해 못했었네. 나, 동네 이발소서 머리 깎고 온 그 날 삐져나온 머리가 유독 많은 이유를 그 땐 이해 못했었네.내가 나의 눈이 정밀함에서 어긋난다고 깨달아 확대경 쓰고 진료하기까지 내 시력의 과도기 동안 구강 어딘가 남았을 모자람이 두렵고 힘들게 작업했을 기공소 동료분께 굉장한
아무리 바빠도자신에 투자를 게을리 말고멋지게 연출하며 살아가길… 1980년에 개원한 뒤 처음 10년간은 내 생활의 전부가 치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미국 의학 잡지에 실린 글을 읽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글은 미국 개원의들의 진료와 삶에 관한 글이었다. 대게 두 종류의 삶으로 나뉘었는데, 오로지 진료와 병원경영을 인생의 전부로 사는 의사들(어쩌면 타고난 의사일 것이다)과 진료와 삶을 적절히 조화를 이뤄 진료를 즐기는 의사(어쩌면 날라리 일지 모르지만)들로 나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은퇴시기와 삶의 만족도를 비교해보니 소위 타고난 의사들은 대부분 50대 초반에 은퇴를 생각하고 은퇴 후 진료를 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어도 삶의 만족도는 그리 높지 못했다. 소위 날라리 의사들은 70이 넘어서 은퇴를 생각하고 은퇴 후에도 진료를 주 1회 보길 원했고 삶의 만족도도 높다는 것이다. 또 그들 가족과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타고난 의사보다 날라리 의사가 훨씬 더 좋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은퇴준비는 어떤 삶을 살든 40대부터 서서히 시작하라는 글이었다.아직 은퇴라는 단어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나
우리가 갖춰야 할 덕목은절제된 생활로 성실하며 환자의 ‘필요"에 민감해야 거의 매주 고속도로를 이용하게 돼 독서할 시간도 많아지고, 돌아보고, 구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교량이 놓인 곳과 산을 가로지른 구간이 많아서 고속도로 바로 옆에 묘소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가 가깝게 다가간 것입니다. 하느님, 가족, 친구들에게 얼마나 변덕스러운 나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고속도로라는 것이 한번 들어서면 어느 정도 이상의 속도로 쉼 없이 달려야 하는 것이기에 가끔씩은 나들목을 나가는 차량의 방향 지시등이 너무나 평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뒷모습은 어떨까? 정작 들어선 고속도로에서 나는 제대로 달려가고 있는지? 1987년 9월부터 2001년 11월 1일까지 14년의 경남 진주 소재의 국립경상대학교 의과대학에 근무하고, 고향인 삼천포에서 개업한지도 벌써 5년이 가까워옵니다. 의사이셨던 아버님과 중부님은 응급환자가 없을 거라며 치과의사가 되라고 권하셨고, 1975년 그 당시 일본에서는 치과대학에 입학하면 기뻐서 1억 엔(그 때는 1:3 정도였던가요?)의 축하 기부금을 낸다고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19
참된 진료가 이것이고여기서 얻어지는 마음의 기쁨은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고 보람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심지어 열대야로 잠까지 설치는 진정한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런 무더위에 나는 몇 주 전에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던 홍천 삼생마을 계곡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최초에 이 여정이 시작된 계기는 (주)모아치과네트워크와 한국방송공사(KBS)가 뜻을 같이 해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는 ‘싱싱 일요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서 이었다. ‘一社一村’ 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방송공사에서 도시의 사람들과 농촌의 사람들이 자매결연을 맺고, 이를 통하여 도시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휴식과 농촌체험을, 농촌사람들에게는 지역 특산물 소개와 농촌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에 네트워크에서 의료봉사까지 병행하면 좋지 않을까하고 제안을 했더니 담당 PD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진행을 서둘렀던 것이다. 7월의 마지막 주말인 29일 새벽 5시부터 나의 홍천 여행기는 시작되었다. 잠이 덜 깬 딸아이를 부여잡고 짐들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강원도 2차 호우 피해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들은 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