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서울사람들 생각은왜 이리 바뀌지 않는 걸까 “엥? 또야?”오늘도 어김없이 회의날짜 일주일 전에 쌩뚱맞은 회의통지가 날아든다. 공문에는 온갖 정중한 서체를 썼지만, 강릉사는 박씨의 눈에는 “이날 회의 있거든? 올려면 오고 말려면 관둬. 뭐 안오면 네가 관심없어 안 오는 거고, 너 없어도 회의는 돌아갈 거야. 회의날짜 알려줬으니 고맙지?”라고 약 올리는 글로 읽힌다. “피유…” 한숨 한번 쉬고 마음을 다잡는다. “뭐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또 한번 눈앞을 스친다. 지방에 살지 않았으면 해보지 못했을 경험들….서울에서 열리는 회의는 서울사람들 위주로 날짜와 시간이 잡힌다. 이런 걸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간으로 잡아야겠지. 회의시간은 대개 서울사람 일과 후 저녁시간이다. 서울사람은 일상을 다 보내고 과외로 회의에 참석한다지만, 내가 슈퍼맨이나 순간이동 초능력을 갖지 않은 이상에는 난 오후 일과를 길에 뿌리고 상경해야 한다. 한때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고속버스 안에서 책도 읽어보려 했지만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다가 차에서 내려 멀미기운 이겨내느라 허송하는 시간이 더
하루는 도새기 잡고또 하루는 잔칫상 먹고마지막 날은 웨딩마치 안녕하십니까? 저는 2004년 3월에 결혼했지만 아직은 초보 신랑(?)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살고 있는 제주도 결혼 풍습에 대하여 말을 할까 합니다.제주도의 전통적인 결혼풍습은 3일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3일 잔치란 만약 27일이 결혼식이라면 25일은 도새기(돼지)잡는 날, 26일은 하루 종일 잔칫집에 가서 먹는 날, 27일은 결혼식 당일 이렇게 구성됩니다. 이제 이 과정 중에 신랑 친구들과 신부 친구들 사이에 약간의 신체적 접촉이 있는 손수건 팔기, 신랑상 받기, 신부상 받기, 부신랑, 부신부, 1호차, 2호차 등등 여러 가지가 있어 신랑과 신부뿐 아니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이 3일동안 함께 부대끼는 것이죠. 많이 복잡한가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간소화되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하루 잔치(육지분들은 이것도 복잡하다고 하는데… 아!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제주도가 아닌 다른 지방분들을 통칭하여 육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루 잔치를 했는데(참고로 제 아내는 광주처자입니다.) 장모님이나 처나 많이 놀라더군요. 제 딴에는 3일 잔치에서 하루 잔치로 많이 간소화한 것인데도…
우는 것만으로도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도여자의 슬픔은 줄어들어요 개원 후부터 다니시던 70세가 넘은 부부가 계셨다. 할머니가 오랜만에 오셨다. “서 선생님은 건강하세요? 지금은 술 좀 줄이셨나요?” “여전히 술로 사시지요. 너무 오래된 틀니를 다시 하러 왔어요.” 사위가 암 투병을 하고 있다며 그래도 딸은 먹고 살아야하니 직장을 나가야하겠기에 대신 환자를 돌보고 있다고 하신다. 치과에 올 상황은 아니지만 먹을 수가 없게 되자 힘이 없고 어지러워 병간호도 못하겠어서 할 수 없이 왔다고 하신다. 그래서 시간 예약을 할 수도 없고 딸이 일찍 오게 되는 날에 틈이 나는 대로 와야 한다며 편의를 보아 달라고 하신다. “집안에 그런 큰 일이 있으시군요. 시간 나는 대로 오세요.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은 있나요?” 이미 늦은 상태이고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렸다며 기적만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신다. 한달이면 끝날 수 있는 일이 거의 3개월이 넘어서 끝이 났다. 치료가 끝나고 두 달 후쯤 내원하셨다. “치료 마무리를 해드린다고 했는데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내가 죄가 많나 봐요 원장님, 사위가 먼저 갔어요.” 나를 보더니 원장님 사위가 끝내 회복하
세상의 유혹에 타협않고언제나 원칙을 고수하며장인의 모습으로 진료하다 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방망이 깎는 노인’이라는 수필이 있었다. 교과서는 읽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읽어야만 했기 때문에 좋은 글들이 실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큰 관심을 갖고 읽기는 어려웠다. 그런 교과서의 글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좋은 글이었나보다. 아마도 치과의사로 사는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한 남자가 퇴근 길에 시장을 지나오는데 시장터에서 나무를 깎아서 다듬이질할때 쓰는 방망이를 만드는 노인을 보았다. 마침 아내가 낡은 방망이로 다듬이질하던 모습이 생각나서 노인에게 하나 깎아보시라고 했다. 익숙한 노인의 솜씨에 네모난 나무토막이 금새 방망이 모양을 갖추었다. 이제 다 되었으려니 생각하고 값을 치르려는데 노인이 다 된 것 같은 방망이를 이리 저리 살펴보며 좀처럼 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살펴 보더니만 손잡이 부분을 이리 조금 저리 조금 또 다시 한참을 깎는 것이었다. 그까짓 방망이 하나 만드는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나 싶어 이제 그만 되었으니 그 정도로 하고 돈을 받으시라는데도 무뚝뚝한 노인은 말대꾸도 없이 미끈하게만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조금이나마 혜택을… <지난호에 이어>부킨트 과장님을 비롯한 IBN ROCHID병원 선생님들께서 미리 예진한 환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수술계획을 세웠다. 임재석 교수님께서는 전체적인 진료단 일정과 각 수술 계획 및 수술팀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지정해 주셨고, 장현석 교수님은 구순구개열 환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부터 자료를 받아 분석해온 악교정 수술환자 계획을 세우셨다. 아쉬웠던 점은 계획상 3명 이상의 악교정 수술이 계획돼 있었는데, 현지 교정과 교수님의 수술 동의서 작성 중 환자 스스로 수술을 포기하여 한 명만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4차 진료단에 합류하신 강릉대 박영욱 교수님께서는 이번 진료 일정에서 가장 많은 수술을 하시며 노력해 주셨다. 바쁘게 진행되는 일정에서도 쉬지 않고 수술을 해주셨다. 2003년 가을 맨 처음 모로코 진료 봉사단에서도 함께 봉사했던 안강민 선생님의 담당으로 초진 및 수술 후 치료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제 4번째 진행되는 일정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일정이 지나면서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침 8시부터 저녁까지 일상처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조금이나마 혜택을… <지난호에 이어>부킨트 과장님을 비롯한 IBN ROCHID병원 선생님들께서 미리 예진한 환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수술계획을 세웠다. 임재석 교수님께서는 전체적인 진료단 일정과 각 수술 계획 및 수술팀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지정해 주셨고, 장현석 교수님은 구순구개열 환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부터 자료를 받아 분석해온 악교정 수술환자 계획을 세우셨다. 아쉬웠던 점은 계획상 3명 이상의 악교정 수술이 계획돼 있었는데, 현지 교정과 교수님의 수술 동의서 작성 중 환자 스스로 수술을 포기하여 한 명만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4차 진료단에 합류하신 강릉대 박영욱 교수님께서는 이번 진료 일정에서 가장 많은 수술을 하시며 노력해 주셨다. 바쁘게 진행되는 일정에서도 쉬지 않고 수술을 해주셨다. 2003년 가을 맨 처음 모로코 진료 봉사단에서도 함께 봉사했던 안강민 선생님의 담당으로 초진 및 수술 후 치료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제 4번째 진행되는 일정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일정이 지나면서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침 8시부터 저녁까지 일상처럼
커다란 대로변에낯익은 한국 광고가 보이고뿌듯한 자부심이 저절로 이제는 모로코까지 하루 정도의 비행에는 익숙해졌나보다. 파리 드골공항까지는 11시간 정도 걸리고 3시간 쉬었다가 다시 카사블랑카로… 모로코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간혹 모나코와 혼돈해서 무슨 봉사활동을 그리로 가냐고 하기도 하고, 카사블랑카하면 많은 분들이 영화 카사블랑카나 Bertie Higgins의 노래 ‘카사블랑카’를 떠올린다. 처음 카사블랑카에 갈 때 굉장한 휴양지를 생각해 보기도 했었는데, 카사블랑카는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유럽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서 여행을 오는 휴양지이다. 모로코는 입헌군주국으로 세습 왕에게 최고 행정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왕이 총리를 임명한다. 인구는 약 3000만 정도이고, 면적은 약 70만㎢에 달하며 아프리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 지중해와 대서양에 접해있다. 12세기 초에는 이슬람권 스페인 전역을 통치했을 정도였다고 하며, 언어는 베르베르어, 아랍어가 쓰이고, 프랑스 지배를 받아 불어도 통용되고 있다. 아랍화된 베르베르인이 가장 많으며, 모로코인 대부분이 말리키 율법을 따르는 수니파 이
몸이 허용하는 한평생 잔을 부딪힐 소중한 내 술친구들 사실 개인의 신변잡기에 관한 글을 쓴 지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하다. 수련을 마치고 공중보건치의를 앞둔 훈련소 시절 집사람과 주고받던 여러 장의 편지가 가장 최근의 기억인가 보다. 앞만 보고 내달린 짧지 않은 시간 속에, 돌이켜보면 소주 한잔 권할 좋은 친구들이 생긴 것 같다. 소주한잔. 어느 노총각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한잔의 술잔에 얽힌 추억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나 보다. 때로는 냉정하게 한 두잔 기울이고 빠지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소주 한잔을 기폭제로 삼아 부어라 마셔라 대결구도로 삼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소주 한잔을 부딪히며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몇몇 친구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창동역 1번 출구를 나오다보면 수많은 포장마차들 사이에서 유독 단골삼아 가던 포장마차가 한곳 있다. 쌍둥이네 집이라는 상호처럼 주인아주머니 슬하에 쌍둥이가 있다는 그 곳은 꼼장어 볶음이 꽤 맛있는 곳이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기상이 안 좋은 날, 기분이 울적한 날, 때론 분개한 날, 갖가지 핑곗거리 속에 끌려 나오듯이 회동을
아말감이 금보다 귀한 치료1박 3일 진료마치고 떠날땐이념 관계없이 감사 인사 <1422호에 이어> 순찰원은 금강산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고, 그들 말로는 노동자가 가장 높은 지위라고 한다. 차트는 생각보다 종이 질도 좋아 보이고 내용도 눈에 익었다. 알고 보니 북측 요원과 합의하여 우리팀이 만들어 놓은 차트인 것이다. 먼저 김병찬 박사님께서 서울에서 미리 발치를 부탁 한 환자를 시작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한명의 구강과 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가 근무를 하는데, 우리팀이 2주마다 방문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우리가 지시한대로 환자 관리를 해오고 있는데 이 환자는 신경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발치를 결정한 경우였다. 환자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구강 상태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다. 보철물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고 그나마 전치 구치를 막론하고 임시틀니 수준의 보철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북한에서는 아말감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고위직들이 중국에서 아말감 치료를 받고 오면 금으로 한 것보다도 귀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연탄보일러를 놓고얼마전 전기공사를 해치과에는 어느 정도 ‘온기’가… 2005년 12월 9일 저녁 9시에 동서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이병태 공동위원장과 신덕재 부위원장(열린치과의사회 회장), 그리고 신호성 위원(대한치과의사협회 기획이사) 이렇게 우리 일행 네 명이 강원도 간성행 시외버스를 타고, 간성에 내려 다시 택시로 20분쯤 달려, 금강산콘도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긴 12월 10일 새벽 1시 30분 경 이었다. 금요일 하루 종일 진료를 하고 버스 출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저녁도 거르고 좁은 강원도 산길을 굽이굽이 밤길을 달려 온 터라 온몸은 피곤했지만 내일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북한 주민들이 사는 곳에 간다는 설렘과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해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북측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는 시간이 하루에 오전 8시와 오후 4시 두 차례로 제한이 되어있기 때문에 시간 안에 수속을 마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부산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우선 금강산 콘도 지하에 마련된 현대 아산 사무소에서 방북에 필요한 방북증을 발급 받고 세관신고서 등을 작성해서 통일전망대에 있는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7시 30분. 여기서 이병태
잘 다듬어진 삶을 살아다른 사람들에게소중한 인연이 되길… 전공의를 겪는 이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인턴 시절, 1년차 시절에는 바닥 인생(?)으로 일하느라 정신없어 내 삶을 돌아볼 조금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서 무위고에 시달리던 공중보건의 생활을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나의 전공의 생활, 시간은 참 빨리도 간다. 이제 곧 3년차가 된다. 요즘은 병원에서는 바쁘게 지내다가도 집에 와서 잠들기 전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용하게 눈을 감고 내 삶을 돌아보곤 한다. 치과대학에 입학한지 이제 1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30여년을 살아가며 나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가운데 나에게 좋은 면들을 배울 수 있게 해 준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 시절에 두 팔을 못 쓰면서도 사물을 볼 수 있는 눈과 그 사물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입이 있음을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분의 밝은 웃음을 보면서, 또 자신은 시한부 인생을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