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은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가장 젊은 첫 하루이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젊은 아가씨의 화사한 옷차림을 무심코 쳐다본 순간, ‘아, 봄이 왔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노래 가사 속 이미지처럼 여성들의 산뜻한 원색 옷차림은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신호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사이 바람이 그리 매섭게 느껴지지 않았었고, 한낮의 햇볕은 꽤 따뜻하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계절의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건,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서가 아니라, 주변을 한번 느긋하게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계절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한번 그려 볼 수 있을 것인데, 나에게 있어 봄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계절들보다는 좀더 뚜렷한 편이다.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 때문인 것도 같은데, 어떤 장소 혹은 어떤 풍경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기억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면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부지런히 싸워가며참여하는 모습을 보여보자고… 참 좋은 세상이 온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됐던, 또 결과야 어찌되든, 협회장님께서 ‘여치의 정계진출에 대해 산파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오시니 정말 기쁘다. 20년 전 필자가 본과 3학년 때 ‘여학생회’라는 조직이 탄생했었고, 전남대학교 치과대학 여학생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었다. 그 당시 전체 대학내에서도 여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여보자는 바람이 불어 총 여학생회가 처음으로 출범했는데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여학생 한명만이 참여하는 기존의 총학생회 여학생부에서 독립해, 여학생회라 칭하고 회장을 여학생들끼리 모여 선출했으며, 독립적인 활동과 동시에 학생회와 상호 보완적인 역할분담으로 여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은 학생활동을 해보자고 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치과대학 병원에서 수련의를 선발할 때, 여학생들이 공부는 잘하지만 책임감이 없고 남학생들 보다 일도 잘하지 못하고 이기적라(뽑아 높으면 시집가 버린다고)는 이유로, 남녀 성비에도 못 미치는 수를 뽑았었다. 그나마도 교수님들께서 서로 여자 수련의를 안 뽑으려 하셨다.그 때 필자가 초대 여학생회장으로서 총대를 메고 데모
가지가 잘려나가 앙상해진나무를 보면 왠지서글픔과 분노가 치밀어 올 때가… 아버님이 공무원 생활을 마치시면서 소일거리라도 있어야겠다고 장만하셨던 감나무 밭에 가지치기를 하러갔다. 예년 같으면 당신이 어머님과 함께 가셔서 다 하시고 오셨을 텐데, 작년 추석 무렵부터 갑자기 노환증세가 심해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관계로 내가 모시게 가게 됐다. 아버님이 밭을 장만하신지 7~8년정도 돼서인지 감나무들이 제법 튼실하게 자라있었고,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질 정도로 날은 화사했다. 애초 아버님과 나는 가지치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님은 한 나무에 너무 많은 가지가 달려있으면 나무가 곧고 크게 크질 못하고 열매도 부실해 지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한다 하셨다. 반면 나는 모든 생물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들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느끼면서 살아야지, 우리 인간이 개입해서 이렇게 저렇게 간섭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 주장하면서, 어차피 우리 감나무 밭에서 나오는 감들을 다 먹지도 못하고 팔지도 않을 건데 그냥 감나무들이 그들 스스로 자라게 내버려두자고 했다. 그러나 나무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공
감사와 감격으로 매일매일 새롭게살기를 소원해 본다 토마스는 아내의 외출로 참으로 오랫만에 어린 개구장이 아들녀석의 손을 잡고서 출근을 했다. 그날 아침 첫번째 기차의 통과시간이 되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도개교를 막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있던 아들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뿔사 아들녀석은 벌써 도개교의 톱니바퀴를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황급히 레버를 내리고서 달려가려는 토마스의 귀에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아들을 구하러 갔다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것을 토마스는 안다. 기차안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주저하던 토마스는 돌아서서 힘껏 레버를 당긴다. 기차의 경적소리는 토마스의 비명소리를 삼켜 버린채 하늘로 사라져갔다. 우리가 그 기차에 타고 있었고, 나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면 우리는 토마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의 장례식에라도 찾아갈 것이고, 아이를 잃은 토마스부부에게 위로의 편지라도 보낼 것이다. 또 평생을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 것이다. “아버지~! 저 죽기 싫어요!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예수님은 기도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귀를 막고 돌아서서 괴로워하시면서 울고 계셨을 것이다
박선영(作)2002년 제29회 상미전 작품中.Oil on Canvas.
다시 환자와의 갈등이 시작된다하지만 몇 개월 후면내게 고마워 할 할아버지의 모습을… 어떤 환자1년쯤 전 일이다.야간진료시간에 중년의 고집이 세게 보이는 딸기코 아저씨가 부인의 손에 이끌려 치과에 왔다. 한눈에도 고집 세고 다른 사람 말 듣지 않게 보이는 분이 어찌하여 부인 손에 이끌려 치과를 왔을까 궁금했는데, 입안 검사를 해 보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풍치와 우식증이 심해 뿌리만 남아있는 치아도 많고 풍치로 흔들리는 치아도 많았다. 중요한 점은 잇솔질이 제대로 되지 않는 점이었다. 건강보험증을 보니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것으로 보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인 것 같은데, 술 접대 할 일이 많아서인지 이를 제대로 닦지 않는 것 같았다. 올해로 치과의사가 된지는 18년, 개업한지는 15년이 다 되간다. 오랜 세월 한 장소에서 하다보니 개원 초기에 치료받은 환자들이 가끔 내원하는 경우가 있다. 10년이 넘은 내가 치료해 준 보철물과 치아들이 무사한지 궁금해 현재 내원 한 이유와 상관없이 옛날 보철물과 치아들을 하나 하나 검사하다 보면 정말 나도 놀랄 정도로 깨끗하게 잘 살아남아 있는 것들을 보며, 작은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얼
삶은 단 한번 뿐이기에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부딪히면서… 살면서 생각해본다. 지나온 시간들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 저편에는 아쉬움도 미련도 아픔도 그리고 기쁨도 배어 있다. 모든 것이 계획돼 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진학 했을 때 모든 족쇄에서 풀려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갑갑한 새장에서 자유의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학도 도피안은 아니었다. 더 큰 새장이었고 그 큰 새장은 커다란 중압감으로 다가왔었다. 졸업. 마침내 그 큰 새장을 벗어나 이제는 정말 자유로운 하늘에서 훨훨 날 수 있으리라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산지 15년의 시간이 지났다. 헤어날 수 없는 반복의 굴레처럼 아직도 나는 새장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새가 돼 이젠 날 기력조차 없는 아니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가 된 것은 아닐까? 어떤 인생도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으리라. 과거의 기억들이, 그 모든 추억들이 얽혀서 현재의 나를 있게 했으리라.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이 삶의 고뇌를 말해주고 듬성듬성해진 이마는 세월의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