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 떨어진 곳마음에 두었다.다음 날 가보려벼르다. 벼르다.이젠 다 자랐소” 고요함이 흐르는 밤이다. 이렇게 적막이 흐르는 밤이면 가끔씩 상념에 젖어보는 시간이 있다. 거기에 환한 보름달이면 지나간 추억이 짙게 뭍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둥근 달은 보이지 않고 가슴 저리고 쓰라린 가련한 달, 그믐달이 나의 맘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 객창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나도향은 그믐달을 그렇게 표현하질 않았는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는 그믐달을 보며 정말이지 나도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다. 돌이켜 보면 아득하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참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를 아무리 불러도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지난날을 혼자말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그렇게 걸어 왔나보다. 프로는 아니지만 한 홀 한 홀 골프공의 인생처럼 남들은 파를 잡으며 아니 버디를 잡으며 인생의 전반홀을 도는 시점에 난
내가 입에 문 것은 순대가 아닌 뇌신경의 어느 한 가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은 눈물이 마른 듯 싶다. 싱숭생숭한 기분에 젖어 찔끔거리다 만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눈물에 소리를 더해 울어 본 적은 요사이 없었다. 얼마 전 좀 서운한 일(?)로 눈물을 보인 아내의 얼굴이 지난날 엄청난 양의 눈물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1990년 내가 작대기 3개 상병계급장을 달고 포병대대에서 사격훈련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 나는 무선 통신병이었고 몇 시간 후에 있을 야간 포사격을 준비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임무는 산허리 중간쯤에 위치한 지름 10m의 표적에 불을 지피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등에는 무전기를 메고 양손에는 불을 지피는데 심지로 쓸 걸레 비슷한 것들을 들고 불발탄이 널린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해질 무렵, 커다란 표적 위에 올라서서 노을 빛에 물든 들판과 먼 산을 바라보노라면 군대생활의 답답함이 심호흡 한순간에 사라지곤 했다. 그날, 표적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등에 맨 무전기가 칙칙거렸다. 나에게 임무를 관두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야간사격표적을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중요한 일이 없을 듯 싶었지만 복귀하라는 다급한 무전에 뭔가 느낌이
빈자리 오인종(作) “IMPRESSION” 회원 대전 시티치과 원장
치료를 받기 위해 아침 6시부터 기다린 분들에게 나의 치료가 큰 도움이 되길…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3일까지 5박6일동안 몽골에서 2003년 하계 해외진료 활동을 벌였다. 이번 진료봉사는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르노고비도의 도립병원에서 펼쳐졌다. 고비사막의 동쪽 인구 5만 명이 사는 이 지역은 나무 한그루 없고 풀도 잘 자라지 않는 마치 전장터를 방불케하는 열악한 환경의 시골로 유아사망률이 아주 높고 성인병이 아주 많고 특히 치아는 반상치가 많아 대부분 사람들이 전치부가 검붉고 보건의료 혜택이 절실한 곳이다. 우리 열린의사회는 이번 봉사활동을 위해 내과, 소아과,피부과, 치과, 한방분야의 의료진과 자원봉사자와 회원자녀 7명 등 모두 23명의 봉사단이 파견됐고 울란바토르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남녀대학생 15명이 통역을 맡았다. 작년보다 경기가 좋지 않은 영향인지 3분의 1정도 인원의 감소로 봉사단장을 맡은 나로서는 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의료진 자원봉사자, 학생봉사자, 통역들이 너무 열심히 해서 2500명의 진료를 알차게 끝낼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진료는 우리 단체의 7번째 몽골 봉사인데 작년까지는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진료를 했는데 이
박명애(作)·84년 경희치대 졸·현)중랑구 성누가치과의원 원장
익어갈수록 맛이나는 김치같은 사람 나 자신을 담그어본다 전업주부도 아닌 내가 김치를 담그는 이유는..? 요리사가 장래희망인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의 성화 때문이다. 아들은 김치를 먹을때마다 “금도끼가 네도끼이냐, 은도끼가 네도끼이냐”하는 산신령처럼 “이 김치는 엄마가 담근 거예요? 아니면 산 거예요?” “ 아니 엄마가 조금 샀는데..”하면 “저는 엄마가 담근 김치를 먹고 싶어요 이제 김치 사지 마세요” 하며 협박아닌 협박을 하는 것이다 사실 김치는 주로 어머님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간혹 일찍 떨어지거나, 늙으신 어머님 부려먹는 못된 며느리가 되기 싫어 차마 담아달라는 말씀을 못드리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할 수 없이 사먹게도 되는데 사실 매운것을 잘 못먹는 식구들의 입맛에 파는 김치는 너무 맵고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 맘에 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담근 김치는 때깔부터 허여니 요리의 기본인 시각적 맛도 없어 보이는데 실력도 없으니 뭐 그렇게 맛이 있겠나싶지만 아들은 양념이며 그릇들을 챙겨주며 보조역할을 톡톡히 해낼 뿐만 아니라 맛있다고 격려까지 해주니 할 수 없이(?) 아들사랑 받고싶어 김치를 담근다. 나의 김치 담그기 역사는 짧다.
박명애(作)·84년 경희치대 졸·현)중랑구 성누가치과의원 원장
숨겨졌던 능력에 힘 쏟아솔잎만 먹는 역할 말고다방면에서 훌륭한 모습을… 치과대학을 입학한 시점에서부터 난 치과의사가 된것처럼 마음이 풍부했었다. 물론 치과대학 다닌다고 하니 치아에 대해 물어오면 당시엔 오랄로 환자를 치료하는 돌팔이 였으나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후 치과의사가 된 지금은 돌팔이가 아닌것은 확실한데 마음이 풍족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꿈이 현실과 점차 동떨어진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기인한지 모르겠다. 자꾸 환자들로부터 신망받지 못한 치과의사로서, 진료과정이나 상담과정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분들과의 입시름은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계에 종사하는 모든분의 총체적인 불신감이 내재돼 온 결과라 생각한다. 그럴때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가끔은 회의를 느낄때가 있다. 과거 우리나라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은 언뜻 느끼기엔 다른것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한길만 걸어야지 실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다가온다.그러나 만약 성공 했다면 그러한 속담은 우리 마음 저편에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화되면서 한가지만 가지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이 돼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치과라는 天織을 두고 이곳 저곳
박명애 -84년 경의치대 졸 -현)중랑구 성누가치과의원 원장
삶의 안식이 되는 여행 결코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쉬면서 즐기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만나는 생생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인생에서 진정 의미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치과의사 선생님들은 일반의사들 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인지 해외 여행지에 가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치과의사 분들은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어렸을 적 가족 여행을 다닌 기억 빼고는 대학 때 친구들이랑 방학을 이용해 다닌 여행이 전부였고, 본격적으로 방랑에 가까운 여행은 졸업후 였다. 대학 졸업 후 영천 삼군사관학교에서 12주 동안 훈련을 받고, 천안 독립기념관 근처 지금은 상록C.C로 더 알려진 수신면 보건지소에서 만 3년 동안 보내게 됐다. 보건지소 2층에는 숙식이 가능한 관사가 있었는데 이곳이 나의 여행의 베이스 캠프가 됐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그냥 발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 마치 공부 못해 고생한 대학 생활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이….이때 타고 다닌 승용차가 만 3년 동안 16만킬로를 달려 차를 팔 때에는 연식에 비해 주행거리가 많아 매매하는 분이 직업이
박명애 -84년 경희치대 졸 -현)중랑구 성누가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