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영(作) ·유태영 치과의원 원장
서학원(作) ·서울치대 졸 ·서울 서치과 원장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죽지 않는다 사랑할 곳이 있다는 것은 자살을 막는 명약인 셈이다 자살하려고 벼랑 끝에선 사람이 최후의 결심을 하고 뛰어내렸다.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아의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추락하지 못하고 큰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한참후 정신을 처린 그는 찢어지는 고통속에서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아픈 고통속에서 삶을 찾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사람은 죽음이 위험으로 다가오면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사람은 서서히 다가오는 빠져 나갈 수 없는 막다른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르면 죽음을 희망하게 된다. 죽음을 희망하게 될 정도로 위험이 증대되면 그때가 절망이며 절망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현재의 절망은 바로 죽음의 병이다. 보도에 의하면 작년에 연간 자살자는 1만2000명이고 올해는 1만3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하루 36명이란 사람이 자살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연간 인구대비 20만명의 자살율을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살이 마치 전염병같이 창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이 사회는 ‘자살경보’가
우아한 강의를 들으면 황홀한 최면상태에서 업그레이드 된 착각에… 넋두리오늘 아침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밤새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에 깊고 그윽한 고통이 인생의 동반자인냥 같이한다. 언제부터일까? 이 녀석이 같이 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 봄에 부부동반으로 놀러왔던 친구로부터 노안이 어쩌구 하는 소리와 함께 아침 기상시간의 몸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두 전염된 것은 아닐까...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감에 여러가지 신체적인 변화를 느끼게 마련이지만 게으름이란 안락한 꾐에 빠져 하루하루 몸보살핌을 미루다보니 남들이 숙명처럼, 훈장처럼 지니고 있는 소위 성인병이 히죽거리며 다가오는 것같아 은근히 걱정하면서 극기라는 명제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병원에 출근해보면 쌓여있는 산더미같은 치과관련 문서들.... 이제는 쳐다보기도 귀찮을 정도가 돼 버린 신문, 잡지, 선전물들이 수년전에 비해 황당할 정도로 많아져 옥석을 가리는 것은 고사하고 겉표지만으로 내용을 짐작해야 하는 수준이 됐다. 그에 따라 필요한 것도 함께 버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예 집으로 수거해 가서 아까운 저녁시간을 쓰레기 검색에 투자하는 서글픈 인생이 되고말았다. 검색중에 보이는
송영미 作 서울 올바른 치과(최병철)원장 부인
거름주고 파종하고 수확까지 일련의 과정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어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활기차게 사는 것은 더욱 좋다. 함께 힘차게 사는 것도 최고로 좋다.’ (M.F. 이스트맨) 세월은 나이를 따라 흐른다고 했던가 벌써 개업한지 20년이 되고 보니 강산이 두 번 변했나 보다. 작은 시간이 아닐진데 지난 일들이 모두 얼마전에 있었던 일들 같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정말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개업할 당시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목수와 단둘이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고 니스를 칠하고 어설프게나마 실내공간을 꾸미고 진료를 시작했을 때 당시 개업을 준비한 다른 선생님들의 번듯한 인테리어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 설레임과 뿌듯했던 느낌은 아직도 잊지 못하리라. 개업할 당시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3가지 목표는 있었다. 그 중에 첫번째가 병원 문턱을 낮추어 보겠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 당시 의료보험 시행 초기라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분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영세민, 군인, 장애인, 분들께는 무료진료를 많이 했으며 영세민과 장애인들의 무치악 틀니 시술은 지금까지 해 오고 있다. 다행히 지금은 국가의료
유해경 90년 조선치대 졸 대전 성남치과의원 원장
신발을 벗어보니 발바닥은 여러군데 벗겨져 있고… 이 순간만은 내가 최고였다 4학년(40대)에서 5학년(50대)으로 올라가기 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멤돌 무렵 친구가 달리기를 한다는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해서 그 친구가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는 종합경기장을 찾아간 것이 2000년 11월 중순이었다. 400m 트랙을 세바퀴 도니까 숨이 차오르고 힘이 들기 시작 했으나 억지로 2바퀴를 더 달려 2Km를 채운 것이 나의 마라톤 입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달리기가 마라톤으로 발전된 것은 점점 거리를 늘려 10Km 정도를 무리없이 뛴후였다. 이듬해 4월 ‘전군간벚꽃마라톤’대회에서 Half Course를 신청했고 2시간만에 완주했다. 뛰고나니 Full Course에 도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 ‘춘천마라톤대회’에서 Full Course에 도전키로 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하기 위해 Internet을 뒤져 자료를 찾아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한달에 300Km 정도를 소화했고 산악훈련과 Interval훈련도 추가했다. 대회 5주전에는 도로에 나가 35Km 정도를 3시간40분만에 달렸다. 약간 자신감이 생겼다. 드디어 2001년 10
유태영(作
생일날 엄마가 부른 차분하고도 낭낭한 부용산 유달리 가슴에 와닿는데… 우리치과는 광주에서 오래된 주택가 풍향동이라는 동네에 있다. 1971년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아버지가 집장사와 블록 공장을 하시면서 6년을 이근처에서 생활하던 어린시절 나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환자 분들을 아버님, 어머님으로 부르면서 항상 낯익은듯한 마음으로 그런데로 보람을 갖으며 일하고 있는 듯하다. 7남매 막둥이로 태어나 아버지는 환갑을 지나 내가 고등학교때 돌아가셨는데, 나는 노가다했던 아버지를 집짓는 곳에서 항상 다정하게 놀아주셨던 것들과 저녁이면 엄마의 부탁으로 선술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면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와 노래로 창피함보다는 왠지 자랑스러운 느낌으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시고, 감정도 풍부하시고 아는 것도, 경험도 많으시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날마다 취해 계시는 아버지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 절반의 노래는 엄마가 아버지의 입을 틀어막던 기억,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해방전후와 한국 전쟁중 좌익활동의 회한을 끝내 떨치지 못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이제 30년여년이 지나 나도 나이 중반의 사회인이 됐다.
천예숙 홍대 미술대학원 과정 수료 안성모 치협 부회장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