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는 김정돈으로 금사(錦史)로 서예에도 능하셨고 인천 경동에서 금성상회를 하셔서 대성하셔서 아버지, 막내 고모님 등을 데려다가 서울로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집이 내동에 있었는데 아담한 양옥으로 2층에 서실이 있었는데 책으로 가득 했었다. 큰 형님 재경, 둘째 세경 형님이 계셨었는데 6·25 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셨다. 셋째 우경은 나와 같은 나이로 서산 중학교를 함께 다녔고, 경복고등학교,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오래 근무했었다. 막내 기경은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지키며 고향에서 살았다. 복경 큰누님은 옛 이원사 김명엽사장의 부인으로서 여원사 운영에 큰 힘을 기울이고 계셨었다. 진명학교 출신으로 늘 활발하여 사회할동을 하셨었다. 둘째 숙경 누님은 소프라노였는데 유명한 무용가의 부인이시었다. 내가 고등학교 대학다닐 때 사촌들과 그 누님댁에 있기도 했고 어려운 때는 늘 가서 신세를 많이 졌었다. 조카 귀남이도 음악을 공부했고 소희 사촌도 그곳에 있었고 막내 순완누이도 같이들 있어서 늘 행복했었다. 둘째 누님댁은 사간동이였고, 그후 대조동에 살았는데 그 누님은 늘 깨끗하시고 우아하셨다. 과일도 배와 포도 등 아주 좋은 것으로만 사오시고는
알 수 없는 길 김태진(作) ’77 경희치대 졸업 ’98 인사동 백송화랑 ‘해너미 사진전’ ’99 인사동 경인미술관 ‘Y-Photo 사진전’ 경기치원 편집위원 경기 용인시 김태진치과의원
온갖재료 통째로 부글부글... 잡탕찌개 메뉴의 원조 못해서가 아니라 못하는 척할 뿐 연애시절, 아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나의 냉장고 살림이었다. 이 새침데기 아가씨는 그동안 남자 혼자 사는 아파트에 절대로 안 와보는 것으로 요조숙녀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친구들 커플이 모여서 외식을 했는데 2차 행선지는 나의 빈 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싱글 사나이의 썰렁하던 아파트에 열댓 명 손님이 모여 들었다. 짓궂은 친구들이 이 아가씨에게 마실 것을 부탁했다. “뭐 없습니까? 커피도 되고, 맥주 같은 거 있으면 주세요. 어젯밤에 드시던 것도 괜찮습니다.” 이 아가씨는 억울해서 죽겠는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히 일어나더니 일단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 보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때 아내는 냉장고 안이 텅 빈 것을 보고서 처음으로 이 남자와 결혼할까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열어 보니까 커다란 냉장고 안에 우유 한 통, 주스 한 통만 들어있더군요, 그게 참 안쓰럽게 느껴지면서.......” 콧대 높았던 아가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이아몬드 반지도 장미 정원도 아닌, 빈 냉장고였던 것이다. 내가 그 시절에 우유하고 주
뱀사골 최용묵(作) ’43 경성치과 의학전문학교 졸업 ’71 아마추어스케치대회 미술 협회장상 ’80 제1회 개인전(서울신문사 갤러리) ’83 사단법인 한국 일요화가회 회장 ’90 제2회 유화전(신세계 백화점 화랑)
삶이 머무는 자리 유태영(作) ’69 서울치대졸업 2001 유태영 작품전(롯데갤러리) 유태영치과원장
작년 초 이탈리아에로의 배낭여행에서 우산을 하나 샀습니다. 몹시도 흐린 날, 피렌체에서 묵는 기간 중에 하루를 내어 ‘시에나’라는 곳으로 갔었지요. 기차에 타서 얼마 안 돼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소나기와는 달리 그저 부슬부슬. 이 정도면 곧 그치지 않을까. 맞아도 되지 않을까.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가는 동안에도 비는 멈추지 않고, 버스에서 내려 깜포 광장으로 가는 길에도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비에는 익숙한 것일까요? 우산을 쓴 사람보다는 그저 모자를 쓰고 비를 맞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날따라 모자조차 없었지요.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우산을 살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구요. 비를 피하느라 일부러 레스토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빗속을 걸어서 이곳 저곳을 뛰다시피하며 구경다니다가 한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우산을 파는 것을 발견! 보르겔리(?)의 First kiss라는 그림이 그려진 하늘색 우산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는 우산이 되었어요.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우산인데다 너무 아름다운 그
내가 죽어도 나의 심장과 몸의 조각들은 어디에선가 쓰여질 꺼다 다시 말하자면 난 죽어도 죽지 않는다. 우리는 한 때 우리가 왜 태어났으며 태어난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해 토론하느라 날을 지샜다. 이 세계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만들어졌다는 의견은 참을 수 없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날 이 세상 속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정답을 몰랐다. 그저 막연히 어떤 힘이 나를 태어나게 했고 자라게 했으며 생명을 유지하게 했다는 걸 알 뿐이다. 처음 임무를 수행하고 우리는 힘들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일이 점점 익숙해지자 일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살고 있는 많은 삶을 지켜보았다. 우리처럼 맨 몸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bus를 타고 다니는 족속들도 만났다. 자기 혼자선 움직이지 못하고 bus를 타고 다녔다. 버스는 고급연료로 움직이는데 이 세계에서 전부를 제공했고, 머나먼 길을 갈 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우리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위대한 시민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길 원했으나 어쩔 수 없이 강의 흐름을 타고 다닐 뿐이었다. 우리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크기의 거대한 몸짓과 무
갈대 김소희(作) 충북 청주 백치과의원 백홍우원장 부인 한국 사진작가협회 정회원 ‘사진마당’ 회원
나의 일생의 많은 시간이 역할 준비의 시간 바보단 세계를 위해 사는게 내운명 나는 시민 R 이다. 그것도 아주 선량하고 모범적인 시민이고 이 세계엔 없어서는 안됐었다. 내가 이런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나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 있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난 운반 일을 했다. O2를 받아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는데 항상 다른 셀을 만났다. 젊은 셀, 늙은 셀. 어떻게 아느냐하면 내가 O2를 건네줄 때 빨려 들어가듯 쉽게 받아들이면 그게 젊다는 증거다. 그들은 O2가 많이 필요해서 우리 친구들은 몰려다녔었다. 친구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생겨났고 우리가 태어난 곳은 지금처럼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 폐쇄된 공간 그리고 기름 냄새 풍기는 일종의 공장이었다. 우리들은 거기서 일생동안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되고 또 몸매를 가꿔야했다. 내 속에 있는 아집과 탐욕들이 점점 제거되었다. 급기야는 자아를 버리고 오직 이 세계를 위해서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해낼 수 있게 우리는 철저히 바뀌어진 거다. 강물의 급류와 완만한 물결에 순응하도록 몸
Road to Heaven 임운경(作) ‘59 서울치대 졸업 ‘82 사진집 ‘꽃의세계’출간 ‘86 제1회 초대 개인전 ’87 제2회 개인전 ‘성지순례사진’ ’88 제3회 개인전 ‘꽃의 환타지’ ’89 작품집 ‘꽃’ 출간
느닷없는 태풍으로 시골 양노원서 하룻밤 보내 토요일 오전 진료를 일찍 마무리하고 햄버거, 인절미에 김밥을 먹고 몇 차례 봉사를 갔었던 한 양로원에 가서 다음날 돌아왔다. 이번에는 노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랍도록 대화 소재가 풍부한 것이 어른들 모두가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을 가지고 계시더라.... 기대이상으로 너무나 건강한 판단력을 가지셔서 시종 싱싱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톨릭치과병원 네분의 믿음직한 원장님들, 젊고 귀여운 그러나 책임감이 강한 우리 일곱 명의 당찬 치위생사들.... 그리고 언제나 착한 사람, 기공사 최실장에다 멋쟁이 강비서까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시골 양로원에서 함께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으며 각자 모두에게 전화기가 다 있으니 중간에 잠깐씩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더라.... 곧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여러 번을 시도한 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단다. 그 토요일 날 밤에는 역사에 남을 무서운 큰 태풍이 지나갔다. 밤이 새도록 시끄럽고 강한 비 바람소리.... 11시 가까이에 정전이 되었는데 핸드폰마저 연결이 끊어져 버리더라.... 별 빛 하나 없는 외로운 섬과 같이.... 이처럼 까만 밤은 이 곳에 사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