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 같은 풍경은 내 눈 속에 녹아 들어갔고, 나의 존재는 그 풍경 속에 녹아 내렸다. 유난히도 눈이 많았던 겨울도 훌쩍 떠나 버리고 따스함이 온몸을 감싸주는 봄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이 만발한 진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꽃들의 뽐냄을 보러 사방각지에서 찾아 들고 있다. 따스한 시내의 골목부터 피기 시작한 벚꽃은 점차 산등성이 쪽으로 그 기운을 펼쳐 나가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피었던 순서대로 지기 시작하고, 꽃이 지면 기다렸다는 듯 연녹색의 조그마한 잎사귀들이 어느 샌가 온 나무를 감싸 안는다. 이런 과정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항상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나는 매년 이때가 되면 출퇴근길에 일부러 시내의 작은 골목들과, 장복산을 넘나들며 꽃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감상에 젖어 들곤 한다. 벌써 10년 이상 벚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느끼는 감흥은 매번 새롭고 경이롭다. 겨울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속에서 다소곳이 때를 기다리는 꽃망울의 모습, 흐드러지게 활짝 핀 꽃들의 빛나는 모습, 한 둘 씩 떨어지던 꽃잎들이 흰 눈꽃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 포장도로 위를 분홍색으로 물들이며 떼지어 굴러다니는 꽃잎들의 장난스
하늘 바라기 정수옥(作) 경남 마산시 최우진(최우진치과) 원장 부인 ’93, ’97 경남 산업디자이너 협회전 경남 미술대전 입선, 개천 예술제 특선 등 입상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약 20년이 된 일이다. 과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농촌으로부터 초로의 부부가 보철치료를 위하여 내원하였다. 부인이 말을 하지 못하여 남편이 옆에서 설명을 하게 되었다. 부인은 듣는데는 문제가 없었고 우리가 이야기 하는 모든 것을 잘 이해하였고 무척 영리하게 보이는 분이었다. 외부로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고 자식들도 훌륭하게 성장하여 좋은 학교 훌륭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입안을 살펴 보는 순간 나는 “악”하고 스스로 소리치고 말았다. Cleft Palate 이니 여태껏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살아온 것이다. “아니 입천장이 ...이런, 이거 수술로 고쳐드릴 수 있는데 ...”하는 순간 그 부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불같이 화를 내고 진료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모든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쩔 도리 없이 나는 전심으로 사과를 하고 말았고 바깥어른분께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여 설명하고 이해시키고자 무진 애를 썼다. 50평생을 자기만의 비밀로 간직하여 온것을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감히 알아내고는 지적을 하고 수술이 필요하다니 뭐
노오란 설레임 수선화 김광현(作) ’56 서울치대 졸업 ’94 치과의원 신축 기념 ‘꽃 사진전’ ’94 ‘Flower days’ 발표회
어느 날, 아버지가 씩 웃으시며 예의 구락부에서 가져오신 누런 종이 봉투를 내미셨다. 안에는 두꺼운 고기와 피클, 양파가 끼워진 진짜 햄버거가 들어 있었고 그 날은 우리 아버지가 영화배우보다 더 멋지게 보이던 날이었다. 미군 구락부라는 곳이 있었다. 여느 비행장이 있는 곳에는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고 그들의 문화에 부합되게 꾸며 놓은 요식장소 같은 곳으로 기억한다. 보통 사적인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남쪽의 어느 도시 변두리에 있는 공군비행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가끔씩 거길 가볼 기회가 있었다. 보통 우리 남매들이나 엄마의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그 곳의 육중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의 향신료인지 방향제인지 모를 냄새가 코를 스쳤고 바닥에는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붉은 보가 깔려 있는 둥근 식탁에는 번쩍번쩍 윤이 나는 양식기가 놓여 있었는데 어린 우리가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에는 버거운 것들이었다. 어른들 두 뼘 높이는 될 것만 같은 높다란 유리컵에 담겨 있는 밝은 밤색의 음료에는 커다란 얼음조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탁하면 언제라도 와서 또 따라주곤 했지만, 늘 설탕을 끝도없이 흘려 넣으며 그 떫은 맛을 희석시켜 보려했던 우리가
봄의 태동 눈속 노루귀꽃 임운경(作) ’59 서울치대 졸업 ’82 사진집 ‘꽃의세계’출간 ’86 제1회 초대 개인전 ’87 제2회 개인전 ‘성지순례사진’ ’88 제3회 개인전 ‘꽃의 환타지’ ’89 작품집 ‘꽃’ 출간
okchang@kornet.net 너무나 미숙하지만 치통너머에 있는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과 상처에 대해 한번 더 보려고 애쓰고 있다. 거센 물보라 때문에 도저히 앞이 보이질 않는다. 함께 진동하는 광음, 순간적으로 당황되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가늠해본다. 그래 이쯤이면 되겠지. 분명 여기에 있을거야. 또 다시 나타나는 방해물들 이 거대한 장벽, 힘들, 손이 저리고 팔이 아프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데… 그렇게 매일 같이 전쟁을 해왔다. 난 용감한 여전사? 상대는 치아우식증 혹은 치석 혹은 움직이지 않는 치아...... 거대한 힘으로 압도하는 뺨을 제끼며, 언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혀를 밀고서 침과 피가 입안에서 그리고 사람사이에서 매일처럼 용감함을 짜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적들을 철퇴시키겠다고 나선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항상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이 모자라는 시간들이 패잔병들이 부활해서 거대한 적이 되어 압도하고, 결국은 참패해야하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변명해 낼 수가 있을까? 나의 전의는 용맹하였지만 전략도 기술도 수준미달이었다. 그런 부족함을 인정하기가 힘들어 억지를 짜낸 적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그러니까 치과의사가 되어서 몇
봄의 소리 이연종(作) "74 연세치대 졸업 ’97 상명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사진학과 졸업 개인전 ‘북간도조선족’ 그룹전‘98 Today Photojournalism’외 다수 현재 충남 천안 우일치과 원장
어머니는 치료시기를 이미 놓치셔서 발치를 해야만 하셨다. 속이 상한 Mrs. 김은 “엄마는 왜 이 치료도 안하고 살았어?” 엄마에게 화를 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야기는 이미 나에겐 오래된 농담으로 남아, 나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덕담이 되었다. 어떤 젊은 부인이 치아에 문제가 생겨 치과를 방문했다. 자신을 Mrs. 김이라고 소개한 그 분은 고급 의상에 곱게 화장을 하고 너무 요란하지 않을 정도로 품위를 갖추고 교양이 있어 보였다.직장생활을 하는 분 같지는 않았고 당당해 보이는 언행이 비교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자신감이 있는 인상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서 유수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총각에게 한국서 갓 시집온 새 댁 이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치아는 금으로 잘 치료되어 있었는데 방사선 촬영을 해보니 속 안이 상하고 있었다. 하나 인줄 알았던 충치는 두개나 더 있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불편했던 것이다. 금을 열고 충치부위를 제거하고 난 후 항상 의례적으로 환자에게 묻듯이 “금(金)봉으로 할까요 은(銀) 봉(아말감)으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 환자의 대답이 “미국에서도 은 봉을 쓰나요?” 나는
김창윤(作) 김여갑 원장 차남 호서대 시각디자인학과 3학년 (사) 한국현대디자인실험작가협회 2000년 전국디자인공모전 특선 International Young Designer"s Workshop 참가
무엇보다도 고마운 점은 1년간을 서로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이 무척 밝아졌다는 것이다 “이모~. 이사가.” “이사? 이사가 뭐야?” “응. 다른 집으로 가는거야.” “우리 모두?” “아니, 이모랑, 이모부랑, 큰 오빠, 작은 오빠만 가.” “그럼 나는?” 세돌이 갓 지난 작은 딸 아이와 내 여동생과의 대화다. 여덟명을 한 식구라고 생각한 작은 아이는 같이 살던 작은 이모가 이사간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않는 듯 여러번 되묻고는 같이 가자고 졸라댄다. 부여에서 개원을 하고 생활은 논산에서 하다가, 대전으로 이사온지 벌써 1년여가 지났다. 결혼을 한후 연년생으로 딸 둘이 태어났다. 큰아이는 시어머니께서 돌까지 키워 주셨고, 작은 아이는 친정 어머니가 키우시다가 백일 이후로는 아르바이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작은 딸아이가 10개월쯤 되었을 때이다. 집에 온 손님이 둘째 아이의 눈이 이상하다고 하였다. 내사시가 생겨있던 것이었다. 나중에야 원시 때문에 생기는 조절성 내사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이 아이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의 손에 커서 그런가하고 많은 죄책감을 갖기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내 아이를 내가 직접 돌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