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식으로 살아온 내 삶에도 경영 도입 10년후 재평가했을 때 행복한 중년 신사이길 이제 마흔을 바라보며 지금껏 치과의사로 살아오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과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되돌아 본다. 운좋게도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얻게되어 IMF 때에도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은 나의 일과는 멀게 느꼈다. 또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아들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귀여운 토끼들의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훌륭한 치과를 만들기 위한 핑계로 가정은 순서에서 밀려있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은 머리에 새치라기 보다는 많은 흰머리가 늘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넘치는 은발의 물결이다. 하루하루를 스트레스와 살다 보니 치과의사는 스트레스를 먹고 사는 직업이야. 스트레스를 많이 먹어야 배가 부르고 살찌는 거야. 대통령도 임기중반에는 중간평가를 한다는데, 이제 내 인생도 중간평가를 해야 할 것 같다. 주위에 존경하는 선배님의 말씀이 30대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여, 40대에는 꽃을 피우고, 50대에는 열매를 맺어 거둬들이는 시기이고, 60대에는 이 열매를 나눠주는 시기란다. 그런데 나는 삼십대에 무엇을 했는지 매일 반복되는 환자와의 입씨름 속에 의료개방을 앞두고 치과에도 경영
친구에서 천원 꾸어나간 미팅서 만난 그녀 좋아했지만 두번이나 딱지맞은 씁쓸한 기억 본과 2학년 그러니까 86년 여름에 기억에 남을만한 미팅을 했다. 나는 클래식기타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여름방학마다 서울에서 연주회 연습을 했다. 사실 나는 여름방학에 서울에 있으려면 머물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해마다 어떻게 넘어가곤 했는데 86년은 내가 기숙사에 있을 때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집의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집에 돈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뭐 아르바이트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늘 곧이곧대로인 나는 당시 금지된 아르바이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마지막날 나는 5000원 정도를 들고 나왔다. 당장 그날부터 그걸로 2주일간을 생활해야 했다.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학생 때는 그렇게 큰 허물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친구들과 그 날 양평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친구를 면회하러 갔다. 차비와 식비를 쓰고나서 그날 밤에 친구의 집에 갈 때는 주머니에 200원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재미는 있지만 솔직히 좀 어려운 생활을 했다. 아침을 얻어먹고 나오면서 승차권을 하나 얻어서 학교에 갔고 점심 때 친구나 선배를 다행히
늘 새로운 생각·포부 가지라는 은사님 말씀 생생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을 추스리는 것도 좋을 듯 창가로 흘러 들어오는 상큼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해안도로를 따라 출근하면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새로운 느낌으로 보여주는 바다를 언제부터인가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개업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찌들어가는 마음과 헝클어져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면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나서고 싶어한다. 그 사람에게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탁트인 시원한 바다를 찾을 것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잔잔한 바닷가에 번뇌의 실타래를 풀고 정갈한 동해 바다에 영혼을 묻고 싶었을 거다. 언젠가 학창시절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들은 어쩌면 세월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와동과 같은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니 늘 새로운 생각과 포부를 가지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벌써 개업한지 17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지 진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개업 초기에는 원장이라는 직함만으로도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각 사회단체모임에
각자의 가치관, 인생 목표 고려해 진로 선택 목표를 세우고 성취를 위해 행복하게 일하자 신록의 계절 5월이다. 해마다 이 때쯤이면 많은 후배 치과의사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이다. 나는 취업의사로, 또 개원의사로, 지금은 훌륭한 파트너들과 공동개원중이다. 아마 이러한 경험들이 새로이 시작하는 후배 치과의사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이 글을 적는다. 내가 처음 시작한 종합병원에서 취업의 생활은 많은 진료과의 전문의사들 사이에서 한 개 과의 과장으로서 위상을 확립해야 했다. 물론 선임 치과과장들이 설정해놓은 위상은 병원경영진과 타 과의 과장들 사이에서는 아주 미미한 정도였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이 평균 환자 수와 과 수입을 늘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료시간이 연장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고 지역권내의 동료 치과의사들에게 환자의뢰를 부탁했고 병원 경영진에게 치과의 특성을 설명해야 했다. 또 병원 내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치과홍보 및 치아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종합병원특성상 병원 전체의 환자수가 많았기 때문에 환자 수를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점차 직원들의 믿음이 쌓여 직원과 가족들의 소개로 환자수가 늘었다. 오
모진 바람과 사투 끝 한강 윈드서핑 성공하니 격렬한 전투서 승리한 군인처럼 만족감 들떠 1. 현실 4월 23일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윈드써핑 경력 1년 밖에 안 되는 내게는 무리야" 하고 집에 있는데 스피드클럽의 양 사장은 빨리 나오라고 난리다. 뚝섬 윈드써핑장에 도착해보니 한강은 심한 바람에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막 세일을 접고 들어온 박선배는 내게 무리라고 말린다. 아직 쌀랑한 강물, 그 전날 김 선배가 학생 때 조정부에서 초봄의 쌀쌀한 강물에서 있었던 사건을 들먹이며 말리던 말이 떠올라 불안해 지면서도 이미 몸은 본능적으로 한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한강물 위의 일엽편주에 몸을 세웠으나 팔 힘만으로는 세일을 들고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모진 바람은 어느새 나를 잠실대교 근처까지 끌고 갔다. 바로 앞에서 구조 모타보트가 써핑을 포기한 윈드써퍼와 장비를 태우고 지나간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오기로 버티는 것도 역부족, 세일을 강기슭에 대고 얕은 강바닥을 걸어서 장비를 질질 끌고 출발점쪽으로 가고 있는데 몇 년 경력의 최원장이 근처까지 와서 뭐라고 코치를 한다. 하지만 거센 바람소리에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시한번 강
배운다는 것 자체가 치과의사로서의 삶 부족함 투성이인 나 자신 항상 반성해 어느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다. “왜 당신은 내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냐?” “나는 살아가고 있는 현세에만 관심이 있다. 알지 못하는 내세에 대해서는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정신질환의 근본 원인이 내세에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느냐? 만약 당신이 생각을 좀 바꾸어서 약물과 대화요법이 아닌 원인치료에 치중한다면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구강 건강을 치아 및 주위조직에만 국한해서 보려는 협의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전신적 관점을 가지는 그러한 치과의사이고 싶다. 치과질환을 숲속에서 나무의 질병의 원인을 찾아가는 원인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평생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해부, 생리 등 기초의학뿐 아니라 내과 등 임상의학, 그리고 미학, 심리학 등까지도 overview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치과의사이기 때문이다. 학생시절 기초의학, 미학개론 등을 왜 배우는지 필요성을 이제야 느끼다니 때늦은 감이 있다. 치과의사로서 환자 위에 군림하는 나보다 환자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보를 제공해주고 치유를 도와주는 helper이고
인터넷 사용시 영어 모르면 정보의 미로 헤매 치과의사들도 영어 구사 잘해 자기 개발해야 모두들 새 천년을 맞아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새 밀레니엄에 걸맞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영어회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어공부하면 우선 영어회화 학원이 떠오릅니다. 가는데 20분, 오는데 20분, 수업 1시간 정도. 짜투리 시간 포함하면 거의 2시간. 이만한 시간을 쉽게 내기가 어렵더군요. 퇴근하면 피곤한데 저녁 먹으면 8시10분 정도. 여유도 없이 바로 가도 지각하는 시간. 혹 저녁 모임이라도 있으면 결석도 몇번 해야 하고…. 새벽에는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일어난다 해도 영어회화보다는 체력이 약해 운동을 우선 순위로 시간을 쓰게 되고…. 또다른 방법인 영어회화 테이프와 책, 이것은 여러번 시도해 보았지만 진짜 오래 못 가고…. 더구나 회화는 사람과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므로 계속적으로 내 실력 체크와 정기적 자극이 필요하므로 영어회화에 있어 외국인과의 대화는 필수인 것 같습니다. 그러던중 서구 K원장의 조언으로 폰 잉글리쉬(전화로 외국인과 대화하는 공부법)를 하게 되었습니다. 2년전 M어학원을 1년정도 다녔지만 소요시간 2시간. 50분 수업도 알차지 못하고 처음에
이 시는 지난 3월11일부터 18일에 걸쳐 있었던 「평화와 화해를 위한 건치 베트남 진료단」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던 제가 미라이 양민 학살 기념관과 푹빈 마을에서 느낀 것을 시로 옮긴 것 입니다. 34년 전 베트남 중부 썬틴 현의 작은 마을 푹빈에서 당일 한살배기 아기를 포함한 68명의 양민이 한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특히, 응웬 리 할아버지는 가족 9명을 당일 잃었습니다. 그들의 명복을 삼가빌며 이 시를 바칩니다. 베트남 진혼가 - 푹빈 마을의 응웬 리 - 그대들 어디에 있는가 사탕수수밭 서걱이는 바람 예전과 다름 없는데 마당가에 내리는 햇살도 예전과 다름 없는데 그대들 정녕 어디에 있는가 삼십여년 세월도 나를 속이지는 못해 푹빈의 어느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붉게 젖은 얼굴들 와락 할키며 달려든다 우리 아부지 꼬부라진 허리 곧추세워 바지자락 꿰다말고 그냥 가슴으로 총알받고.. 우리 엄니 죽은 자식 끌어앉고 울음도 채 못지른 체 머리에 총알 맞고... 내 동생 그 불쌍한 놈 풀풀 날리는 알량미밥 한입 가득 넣은 채 밥 먹다가 총을 맞고.. 고된 노동에 손발은 터졌어도 풋웃음 고왔던 내 색시 아랫도리 벗겨진 채로 아랫배에 총알박고... 아장걸음 한
성공하고 싶어 리더쉽 프로그램에 참가 교육내용 책상에 붙여놓고 지키려 애써 84년 2월 재수생활 1년을 마치고 누나와 같이 2주일동안 돌아다녔던 동해안의 눈 덮인 겨울바다와 동해안의 해뜨는 모습은 세상을 처음 보는 나에게는 환상이고 꿈이었다. 그 때 부푼 가슴 안고 수없이 눌렀던 카메라 셔터는 순간의 기쁨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현장에서 느꼈던 감동과 생동감을 표현하고자 대학에 입학하자 바로 백악사진예술동우회에 가입했다. 사진써클 활동을 하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경비가 들어갔다. 입학기념으로 아버님이 니콘 FM2 카메라를 사주셨지만 사진은 카메라만으로는 되지 않는것이었다. 선배들의 다양한 종류의 렌즈를 보며 나 또한 선배들과 같은 렌즈만 있으면 곧 사진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대학 1학년 2학기 납부금이 나올 때 60만원의 납부금에 10만원을 더 붙여 70만원을 탔다.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없이 70만원을 주셨다. 납부금을 타기 전에 내가 원하는 중고 렌즈는 내 카메라에 끼워져서 나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70만원을 받으며 아버님을 속였다는 죄책감보다는 렌즈가 내 것이 되었다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납부금을 내고 렌즈값을 치르고 집에 오니 아버님이 납부
“부모님 살아생전 최선다해 모시길” 당부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아 아버님, 동이 트기에는 아직 이른, 주변이 어슴푸레한 새벽입니다. 어젯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늦은 잠을 청했는데도 눈은 일찍 뜨였습니다. 24년 전 兄의 졸업식 때도 관악산의 바람은 어제같이 매서웠습니다. 철골구조의 교문은 황금색의 화려한 옷을 새롭게 맞춰 입은 것만 빼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예전과 다름없이,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서있건만 그날 같이 옛 사진에서 웃고계신 사랑하는 아버님이 오늘 계시지 않음이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허전하게 합니다. 37년 전 어제와 같은 날인 2월 26일 세느천을 건넌 문리대 광장에서 있었던 아버님의 박사학위 수여식 때의 생각이 사진과 함께 오버랩 됩니다. 의학박사에 알맞은 분위기의, 온화한 사진의 그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게 제 마음에 각인되어 있건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만나 뵈올 수 없음에 회한의 상념이 또 다시 마음을 착잡하게 합니다. 일찍이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신 할아버님의 7형제 중 6男으로 출생하시어 경성제대 의학부에 들어가시고, 3형제가 납북되어 생사도 모르는 비운을 겪으셨으면서도 59∼61
"날로 급변하는 국제사회 환경속에 국가와 민족간 교류 통한 화합 절실” 동구 로타리클럽과 자매결연을 맺은 태국 반페오클럽이 종합병원을 개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원들과 부부동반으로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의 로타리안들이 공항에 나와 있었고 1년전 서울 중앙병원을 견학한 것이 병원을 짓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해 했다. 다음날 산도 없는 대평원을 두시간정도 달려 행사장에 도착하니 정,사복경비원이 경비를 맡고 있었고 태국의 시린던 공주를 비롯한 기관장군인들이 참석하였다. 우리 클럽에서는 50만 바트를 기부하였고 태국 왕실에서는 시린던 공주를 통해 회원각자에 메달을 주었고 병원벽에는 태극기와 클럽명을 새겨 넣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서로의 선물 교환과 지역 기관장들이 베풀어준 야외무대에서 전통 무회들의 무용과 음악을 들었다. 몇번의 만남으로 그들과 정이 들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젠 마음을 열고 정감어린 대화를 하며 그들의 진솔함과 친절 우정어린 예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타리는 자기 직업품위를 높이고 직업을 통하여 봉사의 이상을 실천하고 세계적 우의를 통하여 국제간 이해와 친선과 평화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날로 급변하는 국제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