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국민 모두를 웃고 울게 만든 드라마 ‘응답하라 1998’. 이 드라마에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던 5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필자 또한 매주 금요일 밤을 손꼽아 기다릴 만큼 ‘응답하라 1998’의 애청자였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드라마를 보며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발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모여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옛 추억에 잠긴 적이 많았다.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가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느끼는 고독감이 크기 때문에 옆에서 항상 마음 편히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또한 커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연세대학교 원내생 총대를 맡고 있는 지금, 필자를 포함한 졸업반인 60명의 동기들 모두 임상practice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환자의 내원부터 마지막 치료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본인의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 공부와 임상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일과시간에는 병원 로테이션에, 진료 보느라 바쁘고, 일과 후에는 환자 볼 준비를 하느라 학교에 남아
원장실 책상 옆 창문에 드리운 햇살과 맞은편 건물 사이의 하늘을 보며, 나는 오늘도 계절과 날씨를 느낀다. 봄 햇살이 참 좋고 하늘도 맑은 오늘. 이런 오늘이 내게 감사함을 주고 그 감사함이 전달되어 감사함을 찾게 해준다. 2주 전 쯤에 참석했던 조선치대 여동문회 제7차 정기총회는 아직도 내게 잔잔한 여운과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집과 직장을 오가던 중년의 아줌마인 나는 토요일 오후가 시작될 무렵, 선후배와 동기들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행여나 늦을세라 도망치다시피 치과를 빠져나와 모임장소로 향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선후배,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동기들 덕분에 긴장됐던 마음은 편해지기 시작했고 행사 중 국기에 대한 경례만 하고 앉았다가 국기에 대한 맹세에 다시 일어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일정시간이 되면 길다가도 멈춰 서서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회계 감사보고와 임원 선출 순서에서 깐깐하고 절도 있는 모습은 강하고 믿음직한 외유내강의 부분이 돋보여 같은 여자 입장에서 멋있게 보였다. 손미경 교수님의 국소의치 설계에 대한 명료한 강의, 훈남 후배님들의 멋진 섹스 폰 연주, 재치와 유머로 즐
오후 6시.벚꽃 가득한 교정을 빠져나오는 지금!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아빠는 조금 많은 연세에 3남 2녀 중 막내인 나를 보셨다.‘딸 바보’라는 말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아마 최고 자리를 차지하셨을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막내딸이 태어난 날 너무 기뻐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식사를 대접하신 탓에 잔소리 꽤나 들으셨다 하셨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말을 아끼셨지만 둘이 있을 때에는 속 깊은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으셨다. 덕분에 나도 아빠에게만은 남자친구 얘기를 제외한(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남자친구 얘기를 꺼냈던 날 아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소소한 일들까지 털어놓는 수다쟁이 막내가 됐다. 막내딸이 태어나던 날 아빠의 소원은 내가 10살이 될 때까지 건강히 곁을 지켜주는 것이었단다. 내가 10살이 되던 날 아빠의 소원은 20살까지 나의 곁을 지켜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20살이 됐고 대학생이 된 나에게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생각지 못하셨다며, 축하의 편지와 함께 헤어스타일링기, 그리고 메이크업 브러쉬를 선물하셨다. 10년 후 나의 결혼식에서는 엄마보다 더 많은 눈물을 보이셨고 서운해 하셨다. 아빠는 편지를 참 많이 써주셨다. 사춘기 딸이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략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서로 말씀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대화의 주제가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아버지께 혼났던 적이 있다. “어른들 말씀 하시는데 그렇게 끼어드는 건 안된다”라고 준엄하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름 그때는 “저도 많이 컸는데요”라는 반발심과 함께 언제쯤이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꾸중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갑자기 어른에 대한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다. 첫 번째 다 자란 사람을 어른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선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두 번째 정의인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과연 나는 내 일에 책임을 지고 지금까지 살았던가라는 질문과 사회에서 책임지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어른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정확히
상과대학에서 돈 버는 일을 공부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실상 돈 버는 일을 대학에서 연구해야 하는 학문이 될지 의문스럽다. 돈 버는 일은 일종의 기술이다. 정치도 일종의 기술이듯이, “경제학 개론”에는 “경제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데 반해 정치학은 그렇지 않다. 옛날 예과 시절 정치학개론을 교양과목으로 공부할 때 정치학 개론 교과서에서는 “정치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군중을 선동하고 여론을 수렴하고 —, 이런 것은 다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 초단, 정치 9단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나보다.돈 버는 일도 9단이 있다. 부자 열전을 보면 그 기라성 같은 이름이 모두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했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그들 모두 상도9단(商道九段)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구의 엄친, 영남지역 재단법인체 1호를 등록하신 친구의 어른을 치료해 드릴 때, 평생 재물을 다루시면서 얻으신 재테크의 방법을 일러주셨다. 돈을 세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제 할일에 몰두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돈은 눈이 달려서 만지거나 쳐다보면 도망가는 요물이지만 대의명분을 갖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어느새 모여 들어 온다는 말씀이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신이든 타인이든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런 변화는 지속되는가? 사회생활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관계와 소통은 복잡하고 난해해진다. 이러한 이유를 팍팍해진 세상의 인심과 삭막해진 사람들의 인간미로 돌리는 걸 알아차린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지난 해 한동안 흥행했던 응팔(응답하라 1988)에 심취해 옛날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과도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서로의 긍정적 울타리가 되어 살아가는… 지금의 눈으로는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과거가 아닌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은 어쩌면 몸의 세포 수보다 더 많고 복잡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이세돌보다 더 많은 기보를 입력하고 더 빨리 연산하고 찾아내는 알파고라도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상황 자체보다는 그들이 그 상황을 해석하는 맥락에서 더 좌우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떻게 느낄지는 당사자 과거의 여러 상황과 변수를 다 고려하더라도
어릴 적에는 커피는 달달한 음료라고 생각했다. 처음 어머니께서 드시던 커피를 한 모금 뺏어먹고 나서는, 나는 어머니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종종 때를 쓰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커피보다는 어린이용 커피라면서 코코아를 마시기를 권유하셨지만, 어린 내 입맛에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종종 커피를 타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커피믹스의 프림이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셔서 인스턴트커피 가루에 우유를 잔뜩 넣고 설탕대신 꿀 가루를 타서 주셨다. 어릴 적에는 뜨거운 음료를 싫어했기 때문에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차갑게 마시거나 냉동실에 넣어두고 얼려먹곤 하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을 때는 얼린 커피우유만큼 맛있는 간식이 없었다. 빨리 얼려 먹고 싶은데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30분마다 냉동실문을 열어서 얼어있는 부분을 먹고 다시 얼리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고등학생이 되어서부터는 커피는 어릴 적의 먹고 싶어서 안달 났던 음료의 모습은 아니었다. 졸음을 쫓아주는 음료였고 어머니께서 타주시는 커피가 아닌 커피믹스나 편의점 캔 커피의 형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릴 적만큼 커피를 그 자체로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달달한 믹스커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거리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 “그 때 왜 그랬을까, 그렇게만 안했어도…”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경험은 다들 해봤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 때 정말 잘 선택했어, 다른 걸 선택했으면 큰일 날 뻔 했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경우도 있다. 며칠 전 휴가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창 인기 있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최근까지 시청해서 그런지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하며 우리의 대학 시절인 2002년도를 추억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창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공부와 축구 응원 사이에서 고민했던 사소한 선택의 순간도 아직 기억난다. 이렇게 옛 추억에 잠겨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친구가 얘기했다. “학생 시절 ○○ 자동차 연구 장학생으로 졸업 후 입사를 코앞에 둔 시점에 그 당시 ○○ 중공업 취업 조건이 더 좋아서 연구 장학생을 포기하고 취업했었는데 요즘 들어 후회된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 자동차의 연봉과 삶의 질이 더 높기에 하는 넋두리였다. 또 다른 친구는 8년 간 다니던 회사를
비오는 토요일, 저는 치과에 출근해 있습니다. 진료는 안하고 이것저것 밀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사는 가르치는 업무만 있어 보이는 것처럼 치과의사도 진료만 한다고 환자들은 생각하겠지만 개인치과 원장으로 진료 외 사무, 행정업무, 공부, 연구 등 일이 많습니다. 평소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곤 하는데 치과의료윤리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사회에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집단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집단 전체의 윤리문제가 부각된다는 것은 뭔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지 않을까요? 그 집단이 윤리성이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람만으로 구성돼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특정 직업군의 윤리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직업관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치과의사가 되려 하는가? 우리의 직업은 사회에서 남을 도와줌으로써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기여를 하고 책임성이 높은 만큼 더 많은 사회적 기대와 존경을 받는 것 아닐까요?그러나 이러한 기대 속에서 우리가 경제적 보상만
따르르릉~ 새벽 4시에 웬 전화일까?‘여보세요-’ ‘------ 잣 뎄구나. 자는 데 깨워 미안 하구만—’‘----’‘나 --- 미안한데 지금 좀 와줄 수 있갔어? 의논 할 말이레 있어서 말이야—’피안도 말씨 매부 전화다. 무슨 일일까 어제 저녁 뵀을 때 무겁던 표정이 맘에 걸린다.매부를 처음 만난 때는 1953년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해 7월 27일 휴전으로 한국전쟁이 마무리 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께서 휴전으로 이북에 송환될 인민군 포로 중 자유 대한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반공 포로’를 석방한다고 선포 하셨다. 유엔군사령부는 절대 반대였지만 수용소 철조망이 군데군데 제거되고 국군 헌병의 엄호 하에 인민군 포로를 석방 탈주 시켰다. 유엔군은 무장 지프차로 탈주 포로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석방된 반공포로는 수용소 인근 주민들이 동포애를 발휘 전원 은신을 도와주었다. 이런 까닭에 유엔군 M P 수색대는 단 한명의 반공포로도 찾아 내지 못했고, 또 그들 역시 수색만 할 뿐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인민군 반공포로 석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참으로 위대하신 결단이다. 이승만 대통령 덕에 우리 식구가 된 훗날의 매부는 반공포로 석방까
관악구에 개원한 지 언 28년이 다 돼 가는 가운데 주위의 후배 치과 선생님들과 점심을 1주일에 한두 번씩 먹은 지도 비슷하게 된 것 같다. 요사이에는 직원 걱정, 환자 걱정으로 젊은 선생님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다사다난한 우리 치과계도 빨리 안정돼 화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글 쓰는 재주가 특별히 없어 가끔 기분 전환하기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권해보고 싶다. 이전에 경기도 양평에 친척 초가집이 있어 40대 나이부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님을 모시고 장작불 때는 재미로 자주 들락거렸다. 올림픽 도로를 타고 미사리를 지나 퇴촌 방향으로 가면 좌측으로 팔당댐이 보이고 호수를 따라가다 보면 분위기가 호젓하다. 광동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30여분 가면 우측에 바탕골 미술관이 있다. 전에는 백남준 작품과 어린이 공작실이 있었다. 가족이 관람하기에 부담이 없다. 이어서 강상면 방향으로 직진하면 좌측에 힐하우스라는 넓은 정원을 가진 레스토랑이 있는데 남한강을 조망하며 야외에서 아이스크림, 커피를 마시며 쉬기 좋다. 시원한 남한강 바람에 가슴이 확 트인다. 다시 직진하면 양평대교가 나오고 건너면 좌측에 들꽃수목원이 나온다. 남한강 강변에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수목원에 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