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에는 꿈에 대한 서적이나 자기계발서가 다양하게 나와 있다. 나는 삶이 게을러지거나 무료하고 무언가 자극이 필요할 때 나를 다독이고 채찍질 해줄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책들을 읽어보곤 한다. 자기계발서들을 읽을 때는 “그래~ 이거야~” 하면서 나를 다잡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게을러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반복적인 일상에 나를 깨워줄 만한 것도 이만한 것이 없다. 많은 책들 중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연금술사이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연금술사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끌리지 않는 책 제목에 과학관련 도서인 줄 알았다. 그러던 중 친구가 읽어보고 재밌다는 한마디에 바로 이 책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연금술사에는 산티아고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양치기인 산티아고는 매일 자신이 피라미드에 가서 보물을 찾게 되는 꿈을 꾼다. 그 꿈을 계기로 산티아고는 연금술사가 말한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도 가고 이집트도 가게 되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비가 있지만 결국은 자아를 이루고 보물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 산티아고는 꿈을 꾸고 있고 하루하루 꿈을 향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면 동물들도 냄새로 영역 표시를 하고 다른 동물의 침입을 경계한다. 남지나해의 대부분은 이미 중국이 영역표시를 더욱 확대 해둔 상태다. 그리고 외교적 다툼을 하고 있다. 지금 G-2에 오른 중국은 G-1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태평양을 뚫고 지나가야하는데 미국과 일본에 의해 그 길이 막혀있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더불어 이를 막으려 하는데 정서상 한국과 일본은 공조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요즘 미국은 한국을 못 마땅해 하고 있다. 한국은 지형학적인 문제로 한손은 미국을 다른 한손으로는 중국을 잡고 고민하고 있다. 옛날 강태공이 낚시를 한 것은 고기잡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런 국가적인 문제에 우리도 같은 고민을 한번쯤 해 보아야 할 시기 인 것 같다. 올해는 일본이 1895년 대한제국의 국권찬탈에 방해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해이다. 작년 홋카이도에서 개최된 아시아 임플란트학회때 삿보로 맥주공장 대형홀에서 기념만찬을 갖게 됐다. 구 공장 벽에는 1905년에 준공되었다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 해라면 국권을 빼앗긴 치욕의 을사조약이 맺어진 해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우리는 막걸리도 마시기 어려웠던
한 달 후면 드디어 2015호를 탄 그대들이 이 행성에 도착하겠군요. 레이더에 그대들의 존재가 잡히기 시작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번잡 무미하던 이곳의 일상에 이내 잔잔한 흥분이 일기 시작하죠.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친구들과 뛰놀던 동네, 떠날 때 염려와 격려의 손을 흔들어주던 부모님 얼굴, 또 우주선 안에서 가족보다도 오랜 시간 부대끼며 미운 정 고운 정 들어버린 동료들… 아마 지금쯤이면 한 달 후엔 그들과도 헤어진다는 시큰함이 마음에 부딪혀 올 겁니다. 생각보다 파동이 커요. 뭐랄까 전우애 같은 거니까요. 커피 한잔 마시다 문득 서로 눈이 마주치며 센치해 지는 순간들 하나하나 부디 기억하시길. 그 커피 향이 뜬금없이 불어 와서는 알 수 없는 힘을 주곤 합니다.호기심과 걱정들로 착륙 전 마지막 테스트 준비에 집중하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은 상황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저항하느라 쏟는 마음의 에너지 때문에 배가되곤 하죠.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채로 품고 견디어냅시다. 담백하고 우아하게. 대신 긴 시간 전적인 몰두로 지쳤을 그대들을 위로 할 작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답니다. 뭐, 곡강연에 비한다면야 한참 초라하지만, 어느덧 연례행사가 되
2014년이 다 지나간다. 오래 기다렸던 치과의사로서의 1년. 난 어떠했나? 그토록 꿈꾸던 행복이 왔는가. 아니면 아직도 행복을 기다리고 있는가. 과연 많은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 도움이 된 적은 있었는가. 그 어느 질문에도 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인턴으로서 1년을 바쁘게 보내고, 당연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레지던트로의 과정을 포기하였다. 더 이상 행복을 기약하기 싫었다. 대학교를 졸업 하면… 취업을 하면… 치전원 시험에 합격을 하면… 치과의사가 되면… 수많은 가정 속에서 나의 행복은 항상 미루어졌다. 치과의사로서 학문의 깊이를 높이는 과정도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나의 삶의 방식을 조금 바꿔보고 싶었다.나의 자기소개서의 가장 첫줄을 차지해 온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영향을 주는 삶을 살자”라는 나의 좌우명은 항상 실천 없는 구호에 불과하였다. 지난 34년이란 시간은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었다. 자리가 잡히면 언젠가 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해 왔는데 34년동안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이대로 계속 걸어가도 그런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닌 앞에 주어진 길로만 계속 간다면, 또다시 3년 이후로 행복을
1. 올 봄이었던가. 낮에 한창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단다. 웬일인가 하여 진료 중간에 잠깐 짬을 내어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다짜고짜 “여보, 여자 치과의사라는데… 혹시 이름이 OOO인 분이 치과의사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어요?”순간 책장을 흘낏 올려다보니 마침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명부’ 최신판이 보이기에 시간 날 때 확인해 주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특정 지역에 병원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기에 찾는 데 다소 까다롭긴 했지만 이리저리 뒤적거려서 결국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집에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는 무의식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아내 옛 고교 동창의 지인의 부탁이었다는 것이다. 그 지인의 오빠가 결혼을 하였는데 상대여자(올케)가 W치대를 졸업한 치과의사라고 해서 부모님이 너무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사실 지인네는 상당한 재력을 지닌 집안이었기에 치과의사 며느리만 들이면 당장이라도 좋은 자리에다 병원 하나쯤은 너끈히 차려줄 태세였다. 하지만 그 며느리는 결혼하고 나서도 치과를 차린다고 하기는 커녕 남의 치과에 취직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집안 친지들이 이상하게 생각다 못해 혹시
나의 고향은 대단한 시골이다. 누군가가 그 곳을 ‘깡촌’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순간 발끈하겠지만 반박할 지혜는 없다.지금에 비한다면 그래도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절의 내 고향은 꽤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5일마다 돌아오던 장날이면 서로 먼저 버스에 타려고 악을 쓰시던 할머니들과 고함치던 버스 기사 아저씨…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항상 그 버스 정류장을 지나 옆마을에 있던 학교로 통학했다. 그나마 나는 통학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14명이었던 우리 반 친구들은 4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다니거나, 누군가가 태워주는 자전거의 뒷자리를 빌려 학교를 다녔다. 요즘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누구네 집에 놀러가고 함께 누워서 숙제하고…그런 즐거움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든 환경이었다.그렇게 심심하게(?) 국민학교 고학년생이 된 나의 유일한 설렘은 읍내의 중학교에 다니던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리 집 툇마루에서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를 바라보면 산모퉁이 사이의 찻길이 보였는데, 빨간 버스의 뒷꽁무니가 보이기 무섭게 신발을 후다닥 신고 언니를 마중가곤 했다. 밭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가지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잠겨있던 우리 국민들을 따뜻하게 위로했다. 이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국립 고궁박물관에서는 ‘천국의 문’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에서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과 세계 3대 박물관인 바티칸 박물관 등이 소장한 도나텔로, 귀도레니 등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한 90여점이 전시됐다. 이들 작품 가운데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 몇 점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14세기 흑사병은 중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사망케 하고 원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 또 유럽으로 전파돼 전 유럽 인구의 1/3이상이 사망한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도시 전체가 흑사병으로 폐허가 돼버린 곳도 있었다고 하니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그로 인해 종교의 허무함을 느끼게 됐을 것이다. 그 후 흑사병이 다시 유럽을 강타했는데 처음 흑사병이 왔을 때보다는 피해가 작았다. 이를 무사히 극복한 것을 기념하고 로마 가톨릭의 재건을 위해 르네상스의 고향인 피렌체 정부에서는 피렌체의 수호 성인인 세례자 요한 산 조반니 세레당
이태리 북부 알프스 자락의 한 시골마을 Dolomiti는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돼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자연경치를 가진 곳 중의 하나이다. 이 곳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합창축제 International Choir Festival ‘Alta Pusteria’ 2014에 참여하기 위해 전라북도 치과의사회 남성합창단 musica dentale 단원과 가족 및 갤러리를 포함한 40여명이 지난 6월 9박 10일의 여정에 올랐다. musica dentale는 전북치과의사회원들로만 구성된 국내 유일의 남성합창단이며, 병원에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음악과 더불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갖고자 2011년 8월에 56명의 단원으로 창단 되었고, 이번 이태리 합창제 및 정기연주회를 포함해 모두 10여 회의 공연을 가졌다.62개의 참가 팀 중 유일한 동양 팀으로 그 시골마을까지 찾아 간 열정과 구성원들이 모두 치과의사들이라는 소개에 관객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뜨거운 지지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명이 일어나는 지점은 그 무엇인가에 서로 같은 마음을 느끼고 상대를
극 내용을 소개받고선 야 이거 좀 센 덩어린가 보다, 여차하면 얹힐라 하는 부담에 조금은 무거운 맘으로 찾아간 자리였다. 역시 극은 무지근한 질감으로 무대에서 객석으로 펼쳐져 갔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염려한 체증 같은 유는 아니었다. 그간 잊고, 아니 짐짓 잊으려 비켜 있던 사실에 대한 ‘휘슬 블로잉’이었다고 할까. 극 중 내레이터 역할을 하던 논문준비 대학원생 ‘하나’의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중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한, 기록은 필요한 거’라 했던가. 생각해 보니 기지촌, 혼혈아, 해외 입양 등으로 상징되는 분단 잔혹사는 비단 60여 년 전 선대에 있었던 상잔의 비극에만 묶여 있던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초를 전후해 세 번에 걸쳐, 특별히 한반도 남부 곡창지대를 덮친 혹독한 흉작은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 마냥 이십여 년 전의 전쟁 이래 다시 인구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그것이 이번 연극 속 비극의 단초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또 그것은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개발 년대의 이면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주겠노라 찾아왔다가 그 필요 채우면 언제였나 싶게 사라져 연락 끊던 그간의 수많은 군상 중 하나
어릴적 부터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 소재중 하나는 그리스 신화였다. 그중 하나의 에피소드는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 익히 알고 있듯이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판도라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것들이 봉인되어 있는 항아리를 그 안을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살짝 열어 보고 만다. 그 후 안에 봉인되어 있던 죽음, 병, 증오, 분노, 미움과 같은 해악들이 세상을 뒤덮었고 그 때 부터 세상에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급하게 항아리를 덮는 바람에 가장 깊숙히 들어 있던 “희망”이 항아리가 닫혀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신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가슴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어떤 새로운 선택과 결정을 할 때 우리는 무수히 많은 호기심과 기대로 자신이 가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고 싶을 것이다. 주위의 만류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일부는 아예 상자를 열어 보지 못할 것이고 나머지는 자신의 상자를 열어 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자를 열자마자 나오는 부정적인 것들로 인해 자신의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 버린다. 그것들은 현
집근처에 오랜 친구가 산다. 흔히 말하는 베프. 이 친구가 아들, 딸 둘인데 우리 애들과 학년, 그리고 터울도 똑같다. 근데 애들이 먼저 얼굴을 서로 텄다, 학원에서.물론 그전에 가족모임을 여러 번 해서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본격적으로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아빠들만큼 서로 친해졌다. 학원이란 게 워낙 늦게 마쳐 평일에는 보통 아빠들이 데리러 가지만 평소 공사다망한(?) 본인의 스케줄로 친구가 대부분 애들을 데리러 갔다. 어느날 친구와 둘이서 술 한 잔 하는 중에 친구가 “재호야, 너무 신기하다. 어제 원우랑 건희(친구아들)랑 학원 끝나고 배고프다고 편의점에 데리고 가서 애들 사주고 난 밖에서 기다리는데, 둘이서 희희낙락 만두에 오뎅에 김밥을 앞에 두고 그리 즐겁게 먹는 모습이 마치 수십년 전 우리가 신촌의 어느 편의점에서 시험기간에 잠깐 나와 야식 먹는 모습과 너무도 똑같더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기억의 데자뷰, 대물림.거창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지 아들, 내 아들인데, 둘 사이 하는 행동과 맘이 많이 닮았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 어쩌면 한 가족 내에서도 시간의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되고, 어느새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