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치대 59학번인 ‘1.19회’(치의예과 1회, 19회 졸업의 합성 숫자)가 지난 10월 15~17일 2박 3일간 부부동반으로 전주, 순천, 여수, 남해 한려수도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동문 28명이 커플로, 3명이 싱글로 참여해 총 59명이 리무진 버스를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가이드들의 흥미롭고 유익한 역사적 설명을 들으며 시작된 여행이었다.입학 당시 약관의 나이였던 우리가 반세기가 더 지난 현재 70대 중반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격세지감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여행이어서 피로감이 조금 느껴졌다. 그러나 첫날 관광 후 저녁 식사로 푸짐한 해물 한정식과 곁들인 한 잔의 술이 여수 히든베이 호텔의 ‘ocean view’에 감응해 피로를 상쇄하는 듯했다.3일간의 여행을 한 후 나름대로 기억할 만한 것으로는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걷기’와 ‘히든베이 호텔 회장이 소유한 대궐 같은 한옥’(영화 ‘가문의 영광’에 나옴)이었다. 직접 들어가 보니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져 그 웅대함에 놀라움을 느꼈다. 또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헌신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정착한 독일마을을 둘러봤다. 유람선으로 한산대첩의 주인공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깃든 한산도도 탐방
지금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10여년 전 출퇴근 시간 분당선 전철에서는 시각 장애인 (맹인, 장님, 봉사)이나 하지 장애인 (절름발이, 앉은뱅이)들이 찬송가가 들어있는 녹음기를 사용하거나 때로는 직접 찬송가를 부르면서 비좁은 통로에서 구걸하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때 저는 왜 이들은 찬송가만 부르는가? 목탁은 치지 않는가? 아마 찬송가를 틀거나 부르는 것이 목탁을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벌이(?)가 좋아서 그런가?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한국 전쟁을 겪은 저는 1·4후퇴 때 추운 겨울날 사방에서 포성이 가까이 울려오는데 피난민들은 엄청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피난짐도 버리고 심지어 등에 업고 있던 아이까지 길가에 내던져 버리고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던 기나긴 피난 행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미군들은 후퇴 하면서도 자기들의 생명인 무기도 버린 채, 그들이 타고 있던 지프차에 길가에 내버려진 울고 있는 아이들을 가득 태우고, 일부는 걷지도 못하는 애들을 들고, 안고서 얼어붙은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1952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미국인 스완슨 목사가 우연히 숙소 창문을
1년 전,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님이 학교에 오셔서 강연을 하셨다. 강연 내용은 그의 영웅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이야기였고, 니스코 카잔차키스의 행적을 좇은 그리스 여행을 통해 느낀 바를 2시간 동안 들려주셨다. 왜 몇 년을 보내면서 그런 여행을 했는가라는 누군가의 물음에 원장님은, 그가 쓴 글을 보고 운명처럼 빠져 들었고, 이름만 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양 설레며, 그의 출판된 모든 책과 출판되지 않은 엽서나 짧은 편지도 구해 볼 만큼 빠져 있어, 처음에는 10년을 계획하고 그의 행적을 좇기로 결심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나에게도 저렇게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는지 되짚어 보게 되었는데, 그때 떠오른 사람이 김연아이다. 2009년, 한창 deet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나는 김연아라는, 경기도 고양시가 고향인 한 스케이터를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처음 본 작품은 2008~2009년 시즌의 쇼트프로그램Camille Saint-Saens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이다. 그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음악의 선율과 템포에 모든 트랜지션이 일치하고
소설가 데이빗 실즈의, 에세이인지 인문학인지 서점에서 어느 책꽂이에 꽂아야할지 고민했을 법한 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신기한 책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그 말은 귀납적으로 99.9% 정도 맞다고 할 수 있을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 누구나 이해하는 주제를 아무나 알 수 없을 잡다하고 구체적인 통계와 일화들로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명백히 작가의 10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위해 씌어졌다. 그렇다고 노쇠해가는 아버지를 위한 신파극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오히려 작가의 아버지는 심할 정도로 건강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프롤로그 말미에 적힌 말을 보면 작가가 집필한 심정이 약간은 엿 보인다. :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나보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에 관한 자료를 쏟아 부어 아버지를 매장하려나보다. (…)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며, 아버지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고, 아버지가 내일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책은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 - 이렇게 순서대로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시기에 대하여 나열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죽음에 관한 책답게 첫 장을 시작하는 소제목은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
업무와 회의, 회식의 연속으로 나의 퇴근 시간은 항상 밤 10시를 넘긴다. 일년 중 공유일과 휴일을 제외한 약 300일 중 250일 이상은 야근을 하고 공휴일과 휴가, 국경일을 포함한 약 65일 중 30일 이상은 주말 행사나 특근으로 일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작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날은 일년 중 10분의 1도 되지 않는 35일 정도에 불과하다. 불쌍한 내 인생… 아니 더 불쌍한 나의 아내와 세 딸들…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만 부실한 재테크 능력으로 모은 것 보다는 갚아야 할 빚이 더 많다. 매년 연말이면 자산 목록과 부채 목록을 비교하면서 이 빚들은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은퇴까지 남은 기간과 그 동안의 수익을 대략 비교해 보면 제정 부분에 있어서 내 인생은 그야말로 본전인 셈이다. 노년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셈을 하다 보니 곧 이어질 부모님의 봉양과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들의 뒷바라지가 눈에 들어온다. 부부가 함께 맞벌이를 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어 전에 없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눈이 침침 해지고, 간과 장기 사이에는 지방이 자리잡는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하루 최소
요즈음 개원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원장님들끼리 모이면 힘들다는 말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포함한 원장님들의 최대 고민은 직원 채용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원장이 직원을 면접 보는 것이 아니라 직원이 원장을 면접 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새로운 직원을 구경하기 힘듭니다. 특히 저희 병원처럼 근처에 치위생사 배출 대학도 없고 교통도 불편한 경우에는 더더욱 힘들지요. 직원 구인 광고를 아무리 내어도 면접 보겠다는 전화 한 통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찌어찌 면접을 보아도 마음에 드는 직원들을 찾기는 정말 힘듭니다. 또 간신히 구해서 교육을 열심히 해놓아도 불쑥 그만두기 일쑤입니다.이런 상황에 이번 GAMEX에서 경기도내 예비 치위생사들을 대상으로 한 ‘채용설명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 이제 막 치위생사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을 그들에게 우리병원이 첫 단추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프리젠테이션 자료 한 장 한 장 허투루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들이 원하는
2008년 5월 7일 오후 5시. 하노이에서 탑승한 쌍발식 프로펠러 비행기는 김종철 전 학장님을 포함한 우리 일행 5명을 무사히 라오스 비엔티안 왓타이 국제공항에 데려다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습하고 더운 공기, 그리고 어딘지 모를 서투름. 지금은 없어졌지만 20불을 내고 도착 비자를 받은 뒤 시내 여행자 거리 숙소에 도착하며 바라 본 바깥 풍경은 말로만 듣던 저개발 국가의 그것이었다. 일부 주요 도로마저 포장이 안 되어 먼지가 날리고 있었으며, 소수 호텔을 빼고는 대부분 2~3층의 낮고 낡은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위생 관념도 희박하였으며 2박 3일의 기간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전통 식당에서 먹었던 땅강아지 튀김과 흰개미 알 샐러드 정도?라오스 첫 방문은 이렇게 끝이 났고 개인적으로 2006년 이후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던 베트남 하이퐁 대학은 매년 찾았지만, 라오스를 다시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던 2012년 우리 대학의 백대일 교수님(라오스 치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신)께서 기회를 주셔서 한세현 교수님, 류인철 교수님과 함께 4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다시 찾은 라오스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개발도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지나니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감각이 하나둘 무뎌지는 걸 느끼며 쓸쓸한 마음으로 체념하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가을을 기다리는 설렘이 남아있음에 감사드린다.어제 실버타운에 입소하신 어머님을 뵙고 왔다. 3년 전 60년을 같이 하신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오랜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어머님은 올해 초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버타운입소를 결정하셨다. 남편은 수험생엄마라는 무기로 무장한 나에게 조심스럽게 같이 갈 것을 종용했다. 어머님은 89세이신데 그 당시로서는 꽤 유복하고 개화된 집안의 맏딸로 자라나 명문고와 명문대학을 나오시고 미인대회에도 출전하실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시다. 내가 결혼할 때만해도 어머님은 건강하시고 자신감 넘치시는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어머님은 체력, 인지능력이 떨어지셔서, 혼자서는 멀리 다니지도 못하고, 작은 일처리도 힘들어하시고 많이 외로워하신다. 같이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문득 우선순위를 고민하는 내 자신에 많이 실망했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대한치과의사협회가 롯데제과의 후원으로 진행하는 ‘치아가 건강한 대한민국 캠페인’은 2013년 3월에 제1차 진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28차에 걸쳐 전국을 돌며 저소득의료소외계층, 장애우 및 외국인근로자 등 2300여명을 대상으로 꾸준히 무료치과진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5년 8월에는 전라남도 여수 인근의 ‘개도’라는 섬마을로 진료를 다녀왔기에 아름다운 추억을 잠시 회상을 하면서 회원 여러분들께 치협의 활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금요일 오후 18시 20분발 여수엑스포행 열차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진료를 마치고 17시 경 본인의 치과 직원 3명과 함께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출발했습니다. 보통 30~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도착해서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초유의 교통정체를 만나 단 2분 차이로 열차를 놓치게 되었죠. 직원들과 함께 빈 철로를 바라보며 한참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창구로 가서 기존 티켓 반환하고 21시 40분발 열차로 예매를 했습니다. 혹시 또 열차를 놓칠세라 역사에 있는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안주삼아 맥주 한잔(직원들은 맥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며 소주로)을 하며 분루를 삼키
벌써 8년이 넘었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그날은 내 인생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 날이다.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세상과는 관계가 없는 세계이기에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 정글의 세계에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간 날이다.2007년 5월 17일로 기억된다. 배드민턴 라켓과 신발 가방을 팩키지로 장만해서 배드민턴 체육관을 찾아간 날이….그 전까지는 헬스장이나 스쿼시장 indoor 골프장에 가서 운동을 했었다. 그런 사설 체육시설은 내가 고객이기 때문에 가면 사장님과 코치가 인사하며 운동법을 가르쳐 준다. 난 고객이므로 다른 고객들과 함께 운동만 하고 오면 된다.그런데 배드민턴은 그게 아니었다. 동호인들이 모여 초등학교 체육관을 시간제로 임대해서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배드민턴을 한다.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하는 것도 입회비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클럽 임원단의 허가가 있어야 가입할 수가 있다.매달 회비를 내고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클럽 체육관 청소도 한다. 네트도 치고 걷고 코트바닥 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한다.일주일에 3번씩 월·수·금은 레슨도 받는다. 힘들다. 숨이 찬다.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코치가 말하는 동안의 그 잠깐의 정지
재작년 모 케이블에서 방송한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예과 92학번인 나는 본과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94학번을 부여 받았다. 아마 나처럼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가 많았나 보다.94년도 따듯했던 5월의 연건캠퍼스와 창경궁의 푸르른 녹음, 바람, 그리고 꽃 향기가 바로 엊그제 일인 양 선명하고 부드럽고 향긋하다. 오늘이 2015년 8월이니, 벌써 만 21년전 일이다. 1997년 12월 폭설을 뚫고 시험장에 겨우 늦지 않게 도착하여 국가시험을 치르고, 1998년 2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치과의사면허를 취득했다.1998년은 IMF가 막 시작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엉망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힘들었고 모두가 힘들었다. 다행히도 그 시절 바쁜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을 보내느라 나는 나라의 경제상황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수련과정은 힘들고 괴로웠지만,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전라남도 신안군 낙도 섬마을에서 2년 그리고 성남시 분당구보건소에서 1년 공중 보건의로 군생활을 대신하였다. 2004년 4월 15일, 36개월의 긴 군복무를 마치고 다른 선배님들의 길을 따라 드디어 개원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