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TJB 대전방송의 “문화를 생활화 합시다”라는 공익 캠페인에 출연했더니, 가끔 처음 보는 분에게 인사를 받는다. 불과 10여초쯤의 노출인데 미디어의 위력은 과연 놀랍다. 그림의 배경은 대전시립미술관 로비, 고 백남준씨의 비디오 작품 ‘프랙톨(fractal) 거북선’ 이다. 예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등 사기죠”라던 고인의 ‘고등’화술(話術)에 넘어가지 말라. 작품은 초당 대여섯 번 동영상이 바뀌는 4백여 대의 TV 모니터와, 수족관과 박제 거북이 등 백여 개의 오브제로 구성되어, 3,5 x 4 x 6,7m의 크기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제작되었고, 시대현상을 표현함은 물론, 날개형상을 한 거북선의 노가 미래로 비상하는 진취적인 기상을 뽐낸다. 다만 전시공간이 좁아 화면 배치나 오브제의 예술적인 퍼스펙티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음은 유감이다. 언젠가 넓은 배경을 거느린 활짝 열린 새 항구를 찾아가기 바란다. 현대문명의 배설물들을 마구 쌓아놓은 듯 불규칙한 형태 속에서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시도를, 혼돈(chaos) 속에서 어떤 로직을 찾아내려는 사색에 은유하여, 프랙톨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터이다.20년 전 치의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언론인, 영국 사람, 항일 독립투사 배설(裵設. 베델. Ernest Thomas Bethell)선생을 아십니까?“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 갔단 말인가! (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乎)” 배설 선생의 서거를 안타까워한 고종 황제의 조문(弔文)입니다. 황제로부터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배설 선생은 “내가 대한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느님의 소명이다”라고 했습니다.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자주와 독립,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생애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배설 선생은 우리정부가 선생의 항일 언론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1968.3.1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고, 1988년 ‘뿌리 깊은 나무’가 선정한 ‘이 땅의 사람들’이란 제목의 근대인물 88명 중 유일한 외국인입니다. 이 책은 배설 선생에 대해서 “대한제국 말기에 어떤 한국사람 못지 않게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돌아가신 언론인”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또한 ‘대한 언론인회’는 2004.3.24 ‘언론인 명예의 전당’제1차 헌정자 7분 중 첫 번째로 선정하였습니다.일제의 침탈로 국권을 빼앗기고,
서른이 되면 굉장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스무 살이 되면 자유를 만끽하며 꽃다운 20대를 보낼 줄 알았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여전히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취업에 대한 걱정으로, 스펙과 학점에 대한 준비로 20대 초반을 보냈다. 취업, 입학 등의 수많은 경쟁의 회오리를 지나 보내면 바래왔던 자유와 행복이 있을 줄 알았다.‘송지은’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 제목처럼 ‘예쁜 나이 25살’에 치전원에 입학한 후 또 다른 치열한 경쟁과 수많은 시험 관문을 매번 통과하고 보니 벌써 29살… 내가 상상했던 서른 즈음의 나는 10대, 20대 때의 나와는 다른 훌쩍 성장한 멋진 ‘어른’의 모습이었지만, 현실은 눈앞의 과제와 시험들을 힘겹게 헤쳐 나와 지치고 상처투성이인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자유와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여전히 원하지만, 그건 또 다른 나의 10년 뒤 모습일 뿐이었다. 그래도 25살에는 꿈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나를 응원하며 나의 행복은 5년 쯤 뒤로 미루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생활과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 일상에서
“이제 시작인가?” 본인은 며칠 전에 군의관 신분으로 전역을 하였다. 치과대학 6년, 전공의 과정 4년, 군의관 3년 후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물론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지는 7년이 되었으므로, 병아리 치과의사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정해진 커리큘럼에서 정해진 환자만 보았고, 정글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의 치과의사의 생활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불안하고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비단 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금 시기가, 치과대학을 졸업한 분들과, 공보의 또는 군의관을 마친 치과의사들이 막 사회에 적응을 하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많은 사회 초년생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또한 주변의 지인도 같은 생각을 한다. 그 동안은 정해진 과정에서만 충실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다양한 살길을 찾아가야 하고, 중요한 건 거기에 책임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혼란을 겪는 건 당연한 것 같다. 우리는 그 동안 제대로 된, 중요한 나만의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니까, 더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살길에 대해 조금이나마 같이 고민해보고 서로 격려해보자는 취지에서 이 주제
의료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는 선의의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는 국민들로부터 존중을 받아왔고, 의료행위는 의사의 고유영역으로 여겨졌다. 의료인은 전문가로서 직업윤리를 가지고 전문적 기술과 지식으로 환자를 진료하였고, 이 과정에서 신체침습행위가 있더라도 정당한 행위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의식 신장, 의료행위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 의료기술에 대한 지나친 기대 등의 환자 측 요인과 상업화 및 전문화된 의료공급체계, 의사의 윤리의식 저하와 의료법리에 대한 무지 등의 의료공급자 측 요인 그리고 사회적 불신풍조의 만연, 분쟁해결을 위한 장치의 결여 등과 같은 사회제도적 여건이 맞물려서 의료사고 및 분쟁이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의료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없는 실정이었다. 서로에 대한 ‘약간의’ 신뢰만 있다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사고라는 장면 안에서 의사와 환자는 다소 극단적인 ‘색안경’을 끼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사고란 의료행위가 시작된 때부터 끝날 때까지의 전 과정에서 야기된 예기치 않은 불상사를 의미한다.
온 세상을 돌며 페이닥터도 하고, 대진의도 하고, 검진의도 하고, 종병과장도 했다. 최근 4개월간 선배님들, 동기들과 함께 신규 개원자리를 겨우 찾았다. 병원 인테리어 하면서 가구를 골라야 하는데, 사실 나는 가구가 싫다. 이사를 너무 많이 다녀서다. 광주, 대전, 강남, 동작, 안산, 수원. 같은 동네, 심지어 같은 건물 내에서도 이사를 해봤다. 월세, 전세, 자가, 기숙사, 사택, 단독주택, 다세대, 다가구, 오피스텔, 아파트, 주상복합 안 살아본 방식이 없다.가구는 뭔가 무거워서 무섭다. 가구 발이 내 발등을 찍고, 모서리가 옆구리를 찌를 것만 같다. 포장이사 같은 거 하면 좋은데, 학생 때 이사를 다니고, 신입일 때 다니니까 몸으로 나르고, 좁은 공간에 뭐 들어가지도 않고, 어떤 교직원들이 대학 기숙사의 공간에도 맞지 않는 가구들을 계약해버린 바람에 문도 제대로 안 열리는 학교 기숙사에 살아서. 기숙사도 학기 때마다 방을 옮기라는 통에 새 학기의 시작은 땀으로 얼룩지고 아름답지 못했다. 수험생이라고 촘촘하게 3면을 막아버린 독서실에 사람을 강제 수용시키질 않나. 고등학교때, 대학때, 국시때.이사하기 귀찮으면 버리고 가도 되고, 엘리베이터 없고, 바퀴가
아버지!!가슴 속 깊이 깊이 흥건히 고인 울음을 속절없이 토해내고 있는 오늘밤은 유난히 아버지를 향한 불효녀의 그리움의 회환이 아스라히 떠오르는 밤입니다.아버지 떠나신지 어느듯 이십년 되어가고 차디 찬 북망산 어딘가에 자리잡고 계실 당신이 그리워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 같은 수많은 밤에 겨울을 지난 찬바람을 맞으며 목놓아 통곡하고 싶은 날이 많았습니다.1996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 날, 칠순 생일상을 받으신 한 달후, 홀연히 어머니와 4녀1남을 남겨두고, 우리들의 곁을 떠나신 그날, 죄 많은 셋째 딸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우들을 치료하다가 당신의 비보를 듣고 당신께서 누워계시던 병원까지 울며 달려갔던 그 한 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살아 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하셨던 할아버지 사진 옆에 당신의 사진을 걸어두고 항상 진료 틈틈이 책을 즐겨보시며 태우시던 그 담뱃대는 제가 고이고이 간직하여 당신께서 소중하게 간직하셨던 할아버지의 유니트체어와 엑스레이와 기구들과 함께 저의 작은 병원 로비앞에서 매일매일 저의 하루를 지켜보고 계십니다.아버지!지난 주에는 세종시 청사 보건복지부를 찾아가서 할아버지의 경성치전 졸업 학적부와 치과의사 면허번호를 내 눈으로
난 하나님보다 하느님이 좋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시바신이 하나님일 수 있다.그러나 하느님은 하늘 어딘 가에 계시기도 하고, 내 마음 속에 있기도 하고, 큰 나무 등걸 아래에도 계시고, 부엌 봉당 한구석에 있기도 하고, 장독대에 놓인 맑은 정한 수 한 그릇에도 있다. 하느님에게는 정(情)이 있고, 마음이 있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무엇이 있고, 언제 어디서나 품어주고 어루만져 주는 게 있다.그래서 기대고 싶고, 같이 하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허물을 털어 놓아도 나무라지 않고, 보듬어 줄 것만 같다.항상 고맙고, 의논하고, 떼쓰고, 응석 부리고, 울면서 하소연 하고, 속내를 털어놓고, 웃으며 감사도 한다.첫째로 하느님께 감사할 것은 내가 남을 위해 의료봉사를 할 수 있다는 거다.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던 시절에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한 외국인의 도움으로 질병의 아픔과 고통을 이겨 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 또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이에게 의료봉사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하느님 감사합니다.둘째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는 거다. 사실 돈이 많으면 좋다. 죽
2011년 병원의 탄생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성장한 부산대치과병원의 유일한 동호회, 볼링동호회. 20명 남짓한 회원들의 소소한 활동으로 동호회 생명줄을 연명하고 있던 어느 날, ‘전국 국립대병원 볼링 친선대회’가 제주도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침체기를 걷고 있던 볼링동호회에 활기를 띠게 해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으니..! 대회에 도전장을 던져 놓고 점점 대회가 가까워오자 한 달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었던 회원(필자포함)들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볼링장을 드나들며 대회를 준비했으니… 지금 우리 제주도에 볼링대회 참가하러 갑니다.시원한 제주 바람 맞으며 볼링공을 던지다.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한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근처 맛집을 수소문하여 제주식 고사리 육개장을 한 그릇씩 뚝딱 비우고 볼링장을 들어서니 올해로 벌써 19회를 맞이했다는 대회의 현수막이 펄럭인다. ‘전국 국립대학교병원 교직원 친선 볼링대회’, 전국 8개 병원이 참가한 가운데 사전 연습으로 몸풀기를 하고 있는 국립대학병원 직원들을 보니 긴장감이 마구마구 치솟는다. 첫 참가인 우리병원 직원들은, 수 십년 동안 공만 던져 왔을 것 같은 다른 병원 직원
한 달에 한번 씩 찾아 가는 모교의 원내생들이 일반 환자에게 임상실습을 하는 일차 진료실에 앉아 외래교수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30여 년 전의 나를 생각해본다.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는 참 대학 생활을 여유롭고 즐겁게 한 것 같았다. 친구들과 문학토론 서클도 만들어 활동하면서 여행도 많이 하고 즐겁게 보냈었는데 지금의 후배들도 그런 여유를 가지면서 지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끔 동료들과의 모임에 나가보면 여기저기서 나오는 소리가 치과의사 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물론 20여 년 전의 개업 현실과 지금의 치과들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다. 늘어나는 치과의사들로 개업 자리도 마땅치 않아 서로들 다투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한 배를 탄 동료들인데….그 현실을 인정하고 조금씩은 양보하면서 상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부대끼며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얼마 전에도 후배 한 명의 안 좋은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 했다. 하지만 그 것도 우리네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야하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제는 치과의사로서는 말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눈도 침침해
토요일 오후 퇴근길은 한 주일간의 쌓인 피로가 노곤함으로 몰려오는 시간이다. 진료하는 내내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신경은 어느새 느슨해진 활시위처럼 맥이 풀려 버린다. 할일 없이 열을 지어 이동하는 개미들처럼 도로 위 차량들의 정체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 지루함과 나른함을 달래려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본다. 청취자 퀴즈문제로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을 묻는 여자 아나운서의 상큼한 멘트가 들리고, 퀴즈문제의 힌트로 가수 안재욱씨의 노래 ‘친구’가 흘러나왔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사랑이 날 떠날 땐 내 어깰 두드리며…’ 춘수모운(春樹暮雲)이란 ‘봄날의 나무와 해질 무렵의 구름’이라는 뜻으로,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위북지역에서 봄철에 나무를 바라보다가 강북 지역에서 저문 날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동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쓴 ‘춘일억이백 (春日憶李白): 봄날 이백을 그리워하다’라는 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내게도 친구가 있다. 묵이와 승이는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