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화가 탄생 백년의 신화’를 전시한다기에 주말,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덕수궁 앞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아침, 저녁 의장대의 교대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자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조선 말기시절의 복장을 입고 취타소리에 맞춰 교대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자주 보는 우리에게도 신선한 맛을 준다. 나도 옛날 외국여행 시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그 나라의 이런 풍의 교대식을 보고 한나라의 볼거리로 만족해 보았던 추억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의 심경을 이해하기에 나는 옆쪽으로 피해주며 덕수궁 안 현대미술관을 향해 갔다.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 보통학교를 나왔는데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재직 중인 예일대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임용린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6~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다. 제국미술학교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동족살생의 처참한 시기, 누구나 다 여기저기 전전해가며 목숨을 이어가던 때. 이중섭도 통영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가셨다. 3.8선 이북 강원도 평강에서 먼저 월남 하신 아버지를 따라 어린 오빠 하나는 이북에 두고 한 오빠는 업고 다른 오빠는 걸려서 한탄강을 건너오신 어머니께서는 6·25 전쟁 때 맞은 총탄을 무릎에 간직하신 채 그렇게 가셨다.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살림을 일구시며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도 없이 우리 사남매를 열심히 키우셨다. 부모님의 뜻에 의해 아버지 얼굴 한 번도 못 보시고 어린 나이에 학업도 중단하고 결혼하신 탓에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하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원효로 1가 였는데 오빠들 모두 집에서 먼 광화문 수송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셨고, 나 또한 당시 새로 설립된 사립 상명초등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자모회장은 늘 맡아서 많은 봉사를 하셨으며 자식들도 근면과 성실과 봉사정신을 본받게 하셨다. 나의 도시락은 항상 9첩 반상이었으며 어린이잡지 표지모델 촬영 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맘에 들지 않으신다며 촬영을 중단시키고 그 당시 명동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다 입히신 일화는 이제까지 선명하다. 내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예약은 도맡아 다 해주시고 심지어 병원까지 먼저 줄서시고 계시면
반포중 부자유친에서 37명이 지리산을 성삼재 휴게소에서 오르기로 하고 2016년 5월 27일 오후 10시경에 반포를 떠나 토요일 새벽 1시 반에 휴계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3시경 출발했는데 부슬비가 부슬거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앞 사람이 밝혀주는 등에 의지해서 선두의 아버님들 따라서 부, 자, 유, 친 4개 조로 나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완이와 선두 조로 편성되어 산행을 시작했다. 경사진 돌로 만든 등산로를 걷는데 완만한 오르막으로 되어있어 계속 걸으니 땀이 났다. 부슬비는 처음엔 좀 추운 비였는데 땀이 나자 땀을 식혀주는 고마운 비로 바뀌었다. 지완이도 가보지 않은 지리산 산행을 걱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그런지 조심스럽게 잘 따라왔는데 30분 이상의 오르막 길이 계속 되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자 땀과 비로 범벅이 된 바람막이 옷을 벗고 물기를 털며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여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는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지리산종주시점이라는 팻말이 달린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등을 배낭에 매달고 어둡고 좁은 숲속 길로 들어섰다.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이었다. 20여명의 증권회사 직원들이 회사 부근 식당에서 1차 회식을 치렀고 2차 술집으로 가기 위해 차로 이동했다. 거나하게 취한 지점장이 손수 운전을 하려 하자 젊은 직원이 지점장 차 열쇠를 낚아채 운전대를 잡고, 다른 직원들이 지점장을 밀다시피 뒷자리에 태웠다. 그때는 자가용이 흔치 않아 직원들은 택시로 따랐다. 지점장을 태운 차가 우회전하여 약 1km 정도 가다가 건널목에서 여대생을 치었다. 차를 멈춘 직원이 겁에 질려 지점장에게 애걸했다. 술은 때로는 인간의 육체를 납덩이처럼 무겁하고 정신을 아둔하게 만들어버린다. “지점장님! 사실 저는 무면허입니다. 좀 살려주십시오.” 만취한 지점장은 호기롭게 흥얼거렸다. “알았어, 그럼 내가 수습하지.” 택시를 타고 뒤따라오던 직원들은 사고 5분쯤 뒤에 사고 현장에 다다랐다. 여대생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얼마 뒤 응급실로 형사와 숨진 여대생 아버지가 달려왔다. 형사가 조서를 꾸미기 위해 누가 운전했냐고 묻자, 지점장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혀가 잔뜩 꼬부라진 상태에서 자신이라고 순순히 응답했다. 그 순간 숨진 여대생 아버지의 주먹이 고함과 함께 날아왔다. “이렇게
의료인이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슴 속에 품게 되는 봉사 하는 삶. 치과의사가 되고자 결심하였을 때에 꿈꿨던 내 미래의 모습 중에는 봉사하는 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의 나에 다가가고자 치의학 전문대학원 재학 중에도 봉사 동아리 활동을 하며 봉사의 즐거움을 알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치과의사가 되어 수련의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봉사는 어느새 먼 훗날에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마음의 한 구석에 밀어 놓고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양연미 교수님(전북대학교 소아치과)을 통하여 가까운 익산에서 7월 2일과 3일 양일간 ‘스마일 재단’의 봉사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오랜만에 함께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스마일 재단’이라는 이름은 이전부터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고, 소아치과 전공의로서 장애인 학회에 참가하면서 스마일재단과 나성식 이사장님 만나볼 기회가 생겨 어렴풋이 장애인 구강보건을 위하여 일하는 단체로 알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장마의 시작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치과의사가 되어 진료 봉사를 하게 되는 첫 기회에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 꿈은 무엇인가요? 인생의 목표는?’ 최근 아르바이트 직원분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길고 가늘게 사는 게 인생 목표라 급여가 적더라도 근무 시간이 길지 않고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어쩜 이렇게 꿈도 목표도 없을까 싶기도 하여 살짝 당황스럽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아니, 누구는 벌써 20대에 청년사업가가 되어 회사를 차렸다 하고, 누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었다 하며, 또 누구는 어느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도전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는데, 그저 길고 가늘게 사는 게 목표라니. 이 얼마나 허망한 꿈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의 대답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대답할 때 그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던 표정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삶을 택한 그가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였던 것이 놀라웠고, 순간 어쩌면 이상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꿈 사대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 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나만의 그릇된 편견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출근 길 차안에서 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의사가 쓴 수필집에 실린 내용이 나오고 있었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 노부부가 병원을 찾았다. 진료가 필요한 환자는 할머니였고, 할아버지는 보호자로 내원하셨다. 하지만 유독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병원이 떠나갈 듯 이야기를 하였고,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진료를 보면서도 할아버지는 의사가 한 얘기를 모두 가로채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호통치듯 얘기 했으며 “꼭 약은 먹어야 하나? 얼마나 약을 먹어야 하나? 이 약을 먹으면 완치가 되나?” 하고 큰소리로 따지듯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에 기분이 상한 의사는 한 달 뒤 다시 내원한 노부부를 진료하면서, 들어오자마자 “약은 꼬박꼬박 먹었습니다”라고 얘기하는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할머니를 보며 “약은 아직도 1년 정도는 더 드셔야 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할아버지를 쳐다봤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의사의 귓전에 “아내가 귀가 잘 안들립니다”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약을 1년 정도 더 먹어야 된대”라고 말씀하셨다. 진료가 끝난 후 할아버지는 의사에게 조용히 “저희 아내가 귀가 안 들리는 걸 창
'여러분~! 초절정 미성 작렬 댄스 N 발라드 가수 리안의 새 노래가 나왔어요!” “오오 축하드려요!”… “대박 기원합니다!”… “역시 언제나 멋지세요!!!”… “노래는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 다 좋은데 가수가 쫌….”… “가수가…”… “가수가…”… “가수가…”…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내 목소리가 어디가 어때서 자꾸 가수가 문제라는 거지? 음정 좋아, 박자 좋아, 감정 좋아, 게다가 내가 나름 싱어송라이터잖아? 가사 좋아, 멜로디 좋아, 반주 좋아, 게다가 내가 또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이빨도 스물 몇 개, 아니 도대체 가수가 뭐가 문제라는 거냐고… 응? 응? 이것 참, 갈수록 삐딱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네.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지? 보란 듯이 빌보드 챠트 1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놈의 가수 자질 논란 따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이게 당최 쉽지가 않네. 오또카지, 오또카지, 오또카지… 아, 맞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정면돌파하는 거지! 그래, 그럼 내 노래를 다른 가수들에게 부르게 해보자. 그것도 노래를 아주 아주 잘 부르는 친구들에게. 그러면 모두들 똑똑히 알 수 있게 되겠지
지방 작은 동네에서 슬픈 哭聲이 들려왔습니다. 한 청년이 취업에 대한 고통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마침 퇴근하던 군청의 한 공무원과 부딪혀 둘 다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공무원은 어린 아들과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가 있는 젊은 가장이었기에 더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맞을 확률이 높을까요? 투신하는 사람과 부딪혀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더 많을까요? 세상은 투신자살한 그 대학생과 사망한 공무원과의 묘한 악연을 탓하며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허나 어찌보면 그 젊은이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자살한 청년의 남은 가족들은 또 가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남의 가정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까요. 그가 고의적으로 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악의 힘이 작용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공무원의 장례식장에서 투신한 대학생의 유가족들이 공무원의 유가족들에게 무릎 꿇어 사죄했고 공무원의 유가족들은 사죄를 하는 유가족들을 일으켜 세우며
내 어릴 적부터의 꿈은 의사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이 두 꿈이 다 이루어졌으니 진정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기쁘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다.’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그동안 의학(醫學)과 이과(理科)의 세계에 살아왔던 내가 그 세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문학의 세계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의 세계로 날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내 작은 글쓰기는 내 허물을 벗는 일, 알 껍질을 부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어 준 것 같다. 이제 비로소 나는 글을 쓰며, 더불어 나누고픈 작은 몸짓을 할 때마다 나는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좀 더 자유롭게 치켜들어,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진 세계의 껍데기 밖으로 쑥 내민 것 같은 느낌이다.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 되고 싶다. 내 시를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아름다운 시를 쓸 것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알속에 있는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농촌에 대한 기억들뿐이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인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천왕동은 고층 아파트와 지하철역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주거지역이지만 70년대 중 후반까지도 그 곳은 완전한 농촌지역이었다. 하루에 몇 번 없던 버스도 족히 이삼십분은 걸어나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산과 들 뿐이었고 딱히 재미있을 거리는 없었다. 누구나 지루하게 살았음직한 그런 시골동네가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거의 40년 전 그 때의 그 장소로 나를 잠시 옮겨서 잊지 못할 기억들을 몇 가지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사람들을 온통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나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 이면서 부모님께 드리는 반성문이기도 하다. 유리는 깨지는 물건이고 빗자루는 용도가 다양하다 때는 바야흐로 새마을운동의 시기,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넓혀서 관계수로를 확보하고 우물을 정비하고 토담을 이룬 초가집을 계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나의 부모님들도 다른 분들과 함께 마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혼자 남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