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성 용정시 자선총회 박호만 회장(전 용정시장)이 지난 날 개최한 라이온스 광주지구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내광했다. 박호만 회장은 나를 보자마자 “총재님! 당분간 중국에 가면 안 됩니다. 바로 체포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한생을 사회봉사인이라 생각하며 UN NGO 밝은사회클럽을 비롯하여 국제라이온스협회 등 봉사단체에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씩이나 할 만한 무슨 범법을 했단 말인가. 몇 해 전 9월 1일부터 5일간 나는 라이온스 광주 및 전남지역 일부 총재로서 유형용 사무총장, 양희준 재무총장을 비롯한 라이온 66명과 함께 용정시를 다녀왔다. 직전 총재단이 용정시 자선총회와 자매결언을 맺고 용정시에 암소 20여 마리를 전달하고 돌아와 우리 회기에도 암소 41마리를 조선족 독립군 후손들에게 기증하기 위하여 간 것이다. 중국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중국 당국으로부터 거부하는 사람이 되었는가?우리가 전달한 송아지 수십 마리가 광개토대왕이 호령하던 옛 우리 영토 요동 땅 초원에서 펄쩍펄쩍 뛰노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벅찬 감격에 우리의 가슴도 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 항일독립군이 독립을 위하여 말 달리던 비암산 일송정에
"Pull a long face”하면 “죽상을 하다”의 의미다. 여기서 long은 ‘엄숙한, 우울한’이다. 옛 어른들은 얼굴이 너무 길면 ‘밉상’이라며, 2세들 배필 고르기에서 일단 제쳐놓으셨다. 이제는 얼굴이나 체격이 서구화하여 이문세씨의 착한 ‘말 상’은 오히려 매력이 되었지만 전형적인 긴 얼굴은 턱이 큰 치받이(Class III 부정교합)로, 어렸을 때 인형 같던 책받침의 여왕이 성장호르몬 장애로 얼굴과 턱이 길어지면서, 180cm 장신이 된 브룩 쉴즈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말투마저 썰렁한 김구라씨는, “비호감 전성시대”의 풍조 속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막장드라마의 달인 임성한 작가가 중도하차한 적이 없고,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조영남씨와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로 살아온 김수미씨가 공개적으로 싸우고도(‘나를 돌아봐’에서), 노이즈마케팅쯤으로 쉽게 풀리는 것을 보면, 비호감과 막장은 보다 센 자극을 은근히 바라는 국가적인 사회병리현상 같다. 동물의 세계는 다르다. 초원의 신사 기린이나 사슴은 물론 정작 얼굴이 긴 말도 선(善)한 이미지다.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과로로 쓰러진 처녀시인 노천명은 사슴을 두고,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출발어릴적 울산에 살던 때부터 동고동락하던 친구녀석과 휴가때 시간이 맞아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였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가방을 싸지 않고 있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서야 부리나케 짐을 쌌는데, 출발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밀려드는 설렘이 동반된 긴장은 필요 이상의 불안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었다. 급히 챙기느라 빠뜨린 것들은 또 그 여행만의 재미라 생각하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고 가는 날들이 반나절 밖에 안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짧고 빡빡한 사흘이 될 것이라 쉽게 예상 가능했다. 오설록 티 뮤지엄이곳은 ‘차’에 대한 관심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만 파는 ‘녹차 롤케익’이라거나 ‘녹차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산품에 이끌려 티 뮤지엄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역시도 그랬다. 출발이 늦어져 관람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카페음식만 맛보고 나오는 수준이었다.‘차’라는 문화적 소재가 본디 의미함은 ‘여유’나 ‘휴식’과 같은 것일진대 우리는 그것에 정면으로 반박이라도 하듯 아주 신속하게 짧고 달콤하며 쓴 녹색 빛의 특산품들을 맛보고 왔다. 그러는 와중에 문득 차 문화를 알리고 보급하겠다는 화장품 회사 창업주 회장의 뜻이 값비싼 카페와 기념품 가게의 가격표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고양이들에게 안식처와 먹이를 제공하고 고양이들은 나에게 현재의 일상을 선물한다. 지금도 한 놈이 노트북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이 녀석은 컴퓨터 마우스에 관심이 많다. 또 다른 한 녀석은 건너편 책장의 네 번째 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녀석은 꼬리가 도톰하다. 그 도톰한 꼬리를 쭉 늘어뜨려 아래 칸의 책을 무심히 두드린다. 그 툭툭 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다른 한 놈이 달려온다. 책장에 앉아 있던 놈이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 앉아 장난을 칠 태세를 갖춘다. 그 때 노트북 뒤에 있던 놈이 마우스를 슬쩍 건드린다. 나는 그 고양이를 번쩍 안아들어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둔다.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내 무릎 위에 누워있는 우리 둘째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녀석은 노랑이이다. 태어난 지는 이제 4개월쯤 되었다. 지난 봄, 첫째를 데리고 다니던 동물병원에 ‘무료 분양’ 딱지가 붙어 있길래 아기 고양이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들어갔다가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포대기 아래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작은 생명체는 내 손바닥위에 올라오자마자 달달 떨기 시작했다. 딱지가 내려 앉아 얼룩덜룩
내가 허세욱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대한치과의사문인회(치문회)의 세종문화회관 월례모임 자리에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치문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유명 문인들을 초청하여 문학 강좌를 개최하는데 때마침 허세욱 선배가 연자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리남성고 선배이신 허세욱 교수님의 문학세계와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나에게는 미리부터 흥분과 기대에 차 있던 만남이었지만, 막상 얼굴을 뵙고는 감히 말문조차 떼기도 어려워 그냥 조용히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다.이 전에 사진으로는 간혹 뵈었었지만 그토록 인물이 훤칠한 미남이신 줄은 미처 몰랐다. 가녀린 모습의 학자풍으로만 상상하고 있었는데 인자한 모습과 정감 어린 목소리를 가진 키 큰 호남 형이셨던 것이다.문학 강좌가 끝나고 화기애애한 여담이 오갈 때 허 선배님이 번역한 중국시인 ‘지센’의 ‘배’를 지금도 자주 암송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좌중이 모두 놀라는 것이었다. 그 시가 한동안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후로 이미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 번 외워보라’는 허 선배님의 말씀에 암송을 시작하였는데, 비록 짧은 시이지만 너무나 심오한 깊이를 품었기 때문에 낭송이 끝났어
무 당 벌 레텃밭 상추에 무당벌레가 찾아 왔네.농부는 좋아라 웃음 짓고아이는 신기한 듯무당벌레를 만지려 하니두 점 박이 무당벌레는 수줍은 듯사랑하는 줄무늬 무당벌레를 찾아 날아가 버리네.아이는 아쉬우나 무당벌레에게아름다운 사랑 꿈꾸기를 바라며손을 들어 안녕하네.신덕재 중앙치과의원 원장=================고 인 돌오천년 침묵이박모(薄暮)와 더불어지난밤 꿈과 함께 하네.한때의 맹심(萌心)이장대하고 웅대해거석(巨石)으로 태여 났네.이름도 모르고기억도 할 수 없는할아버지의 할아버지꿈속에 행여나조상님이 오셨나 해큰 절로 거석을 안아보네
지난 주말에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해방 전 만주의 조선 군관학교의 총잡이가 대장이 되어 3명의 암살단을 꾸려 일본인 조선 총독과 대표적인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1920년대부터 10년간 꾸준히 일본군을 괴롭혀 온 만주 지역의 김좌진 장군의 ‘북로 군정서’ 부대의 청산리 대첩 이후 보복으로 간도 대학살이 있었던 것과 해방 직전 조선에 진군하려고까지 계획했던 우리나라의 무장 독립운동 역사를 적극 증언한다는 점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무척 의미 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주제를,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어머니 사이에서 난 쌍둥이 여형제의 출생의 비밀과 처음에는 활동에 소극적이던 무장 독립 운동가들이 점점 상황에 몰입되어 목숨을 바치는 과정이 엮여 극적인 요소를 극대화 시켰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조승우, 김혜숙 씨 등의 베테랑 배우들이 특별 출연하여 영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믿었던 동지의 배신과 친일파의 아들의 희생 등이 반전 구도를 이루며 재미를 더했고, 마지막 임무 완수 때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영화를 보다가 문득 1909년 10월 26일
지하철 1호선, 오늘도 어김없이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한 체 겨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치이고 구겨지고, 그래도 짜증보다는 체념이 먼저 드는 것은 어제도 그제도, 출근길 지하철이란 늘 똑같기 때문이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같은 시간 송내역 3-3 같은 위치에서 지하철 1호선에 몸을 실었다. 8시 50분 즈음 서초역에 내려 회사로 걸어갈 것이며, 똑같은 인사로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근처 밥집에서 한끼 때우고 근무를 마치면 또다시 퇴근 인파에 묻혀 집으로 돌아가겠지. 평온하다면 평온한, 그러나 따분하면 따분한 너무나 친근한 일상이다.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갑작스러운 침묵과 함께 전철 내 경직이 느껴진다. 뭔지 모를 이상한 예감에 스마트폰을 치우고 주변을 돌아본다. 사람들의 시선이 창 밖 한 곳을 향해있다. 시선을 따라 내다본 그곳에는 접시 두 개를 붙여놓은 듯한 은색의 찬란히 빛나는 커다란 물체가 유유히 떠가고 있다. 그 그림자가 한강을 서서히 뒤덮으며 다가온다. 그렇다, 미확인 물체, 바로 UFO다.내 눈앞에 UFO가, 외계 생명체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이 어찌 흥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2013년 가을 어느 날 나는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행사로 시각장애인이 세계 최고봉에 등정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시각장애인 친구 송경태는 평소 삶 자체가 에베레스트라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고 싶다는 희망을 말했었고, 그 위험성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난 단지 소개만 해주고 빠지려했는데, 산을 평생 사랑했고 산악인에게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고, 근무력증인 형님을 생각하니 이런 우리 집안의 아픔을 산으로 승화시키고 하는 바람과 시각장애인 친구와 함께 등정하면 의미 있겠다는 생각으로 단장을 맡기로 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도 모르게 간다고 약속해버렸다. 그렇게 평생 산을 좋아했던 산악인으로서 나 자신의 극기에 대한 도전으로 산악인들의 로망인 에베레스트 등정을 결심했다.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 프로젝트는 2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매주의 산행과 수십 미터의 암벽과 빙벽 훈련, 한라산 장구목 설벽 훈련, 그리고 2014년 2월엔 아일랜드피크(임자체 6,160m) 등정 등 성공과 함께 고된 훈련의 강도를 높이면서 내 삶은 온통 산이었고 등정 꿈만 꾸었다. 가족들을 포함한
사람들은 번뇌와 망상으로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번뇌와 망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여러 가지로 많이 얘기되어 있지만 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들어서 쉽게 와 닿아 마음 끝이 시원해지는 답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번뇌는 욕심으로부터 시작하고, 망상은 불안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욕심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더 나은 것을 찾고 싶은 마음이 근원이고, 불안함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해보려는 마음이 근원입니다.이런 생각 끝에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생깁니다. 과연 사람 이외에 다른 동물들에게도 이런 욕심과 불안함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종류가 많아서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좀 더 가깝게 진화한 동물에게서 욕심과 불안함의 특성이 많이 나타나고, 인간과 관계가 먼 동물에게서는 그러한 특성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물 속의 물고기들보다는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등에서 욕심과 불안함의 특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인간과 더 가까울수록 욕심과 불안함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떠한 이유로 이런
나는 후배들에게 ‘언제까지 진료하면서 개업할 것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예전에는 50세까지 일할 것이라고도 했고 50세가 된 이후에는 55세까지만 일할 것이고도 했는데 어느새 나는 60세가 되었다. 요즘에도 치과의사의 정년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그렇게 쉽게 마무리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능력 닿는 대로 봉사하며 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나의 능력이 별거인가? 누구에겐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나의 능력이고 봉사하는 마음일 것이다.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치과의사가 되었다. 북한에서 혈혈단신 홀로 내려오신 나의 어머니께서는 미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나에게 ‘미술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취미로 할 수 있다’며 능력 있는 전문직을 권하셨고, 그렇게 치과의사로서 나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사실 치과대학 생활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항상 불만이 많았고 무언가 이루지 못한 답답함도 있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치과 분야의 지식은 나에겐 늘 채워지지 않는 우물 같았다. 1980년도 초반 독일 유학 동안 나는 치과학문의 다양함에 눈을 뜨게 되었고, 치과가 단순히 치과 학문만이 아닌 미학, 공학과 기계적인 다양한 학문과 연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