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남이 차려준 밥상에 숟갈만 들고 식사를 했는데 이제 직접 음식을 조리해서 다 같이 먹으려니 조금 힘이 들었습니다. 해외봉사 이야기입니다. 모두 갖춰진 곳에서 몸만 가서 봉사할 때와 진료 장비와 약품들을 스스로 갖추고 진료를 하려니 몇 배는 더 힘이 듭니다. 세관을 통과하려니 커다란 장비에 문제를 제기하고 당연한 듯 돈을 요구합니다. 당신네 사람들을 위해 진료봉사를 왔다 해도 막무가내, 진료허가서를 보여주고 현지어에 능통한 봉사자가 강력하게 항의를 해서 겨우 통과를 하였습니다. 이제 배를 타고 3시간을 가야하고 항구에 도착하면 차로 30분을 더 가야 합니다. 비행의 피로와 배 멀미로 고생을 하고 나서야 드디어 도착입니다. 기계에 익숙하지 않는 저에겐 이동식 유니트 체어와 콤프레서를 조립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 봉사자가 힘을 합쳐 이제 진료 준비를 다 갖췄습니다. 첫 환자를 보는 것은 설레임입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이제 진료를 시작합니다. 제 병원에서는 사랑니 하나 발치하면 힘이 들어 휴식을 취해야만 다음 환자를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오면 초인적인 힘이 생겨 어려운 발치를 쉬지 않고 해댑니다. 구강외과 전문의에게 의
지난 2월 인륜지대사라 불리는 큰 행사를 치르고 여행을 다녀왔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가 신혼여행이었는데, 진작에 ‘신혼여행은 꼭 멀리, 유럽으로 가자!’ 라고 결정하여 큰 고민은 없었다. 물론 연애기간이 길어 고급 숙박시설의 휴양지는 따분할 것 같았고, 결혼 후 출산, 육아 등에 시달리다 보면 장거리여행은 한동안 불가하다는 결혼 선배님들의 말씀도 한몫했다. 마음은 1년간 유럽 전 지역 자유여행이었지만, 현실은 8박 10일 스위스, 이탈리아 2국가였던 서유럽 맛보기를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나누려 한다. 스위스에 도착한 첫 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시간 비행으로 많이 피곤했지만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일념하에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다. 리마트강을 따라 취리히 구시가지부터, 루체른의 카펠교, 빈사의 사자상 등. 특히 강가를 따라 조금씩 다르게 생긴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스위스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경관이지 않을까. 다음 날 알프스 산봉우리의 하나인 쉴트호른으로 향했다.(쉴트호른은 해발 2970m의 높이로 1969년 007 여왕 폐하 대작전의 주요 촬영지로 알려져있다.) 지그재그 형태로 생긴
조금씩 조금씩은 내 좌우명이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한 번에 크게 덤비지 않고 실천해 나가다 보면 나중엔 크든 작든간에 결과가 있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할 때 그 실천 가능성이 희박하다거나 턱없이 안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그 계획을 접어 버리기 십중팔구다. 그러나 나중은 생각도 않고 무엇인가를 조금씩 실천하다 보면 조금씩이 모여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점차 그 속도가 빨라지며 목표가 가까워지고 결국은 좋은 성과를 이루게 마련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티끌모아 태산’ 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다. 한번에 어떻게 천리길을 갈수 있으며 어떻게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들 수 있겠느냐! 한걸음을 떼면서 그 먼 길을 다 갈수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없고, 티끌을 모아서 어느 세월에 태산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 시작은 결국 그 목표의 절반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작은 반이다’라는 말이 그 말이다. 진리다. 하다보면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결국 그 성과는 장대하게 된다. 실제로 매일 아침 일어나 집 앞마당에 돌멩이를 하나씩 던져 보아라. 그 돌멩이들은 날이 갈수록 모아져서 세월이 흐르면서 돌무덤을 만들고 결국 나
지난 겨울 휴가 때, 아내와 함께 체코 프라하로 여행을 떠났다. 13시간 가량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프라하는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우선 공항에 있는 통신사에서 유심칩을 구매하고, 공항버스표를 끊어서 예약한 호텔로 출발하였다. 너무 피곤했기에 첫 날은 짐을 풀고, 바로 숙면에 취했다. 숙소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은 뒤, 여행사에서 프라하 시내를 구경시켜주는 투어를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작하여 무하 박물관, 비타 성당, 까를교 등을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재미있었다. 얀 네포묵 성인의 이야기, 비타의 이야기 등을 듣고 나서 전시물을 보니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체코도 겨울이라서 엄청 추웠었는데, 10시간 가량 가이드를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지만, 여행 가이드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둘째 날은 자유여행이었다. 이번에는 둘이서만 프라하를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구시가지 광장에 다시 들렀다가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동상도 보고, 유대인 지구도 둘러보았다. 다리를 지나 카프카 박물관에도 가보았고, 유명하다는 음식들도 먹어보았다. 핫윙이 유명하대서 먹어봤는데, 우리나라 치킨이 더 맛있었던 것 같고, 족발 비
꺼지지 않는 조명탄, 수십 명의 치인들의 업적, 인생관, 철학을 쓴 논픽션, 그랜드 캐니언 천연 같은 대담집‘나는 사람이 좋다’를 낸 저자 이병태를, 나는 잘 안다. 내가 영어의 몸으로 있을 때, 어느 눈 오는 날 나를 찾아준 유일한 후배다. 그는 내가 국회의원 현직에 있을 때는 나에게 치근대거나 알랑거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원거리에서 자유롭도록 해주었다. 수도육군병원에서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편제가 바뀌는 시기에 군대생활을 함께 했고 서울종로구에서 지근거리를 두고 개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한치과의사문인회(Korean Dentists Pen Club)에서 매월 마주 앉아 책과 글을 읽고 듣곤 한다. 만나면 ‘앵두’ 또는 ‘요로캐’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부인 안부도 꼭 물어본다. 이병태는 1976년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번역본이지만 ‘사서삼경’을 탐독했고 기념으로 ‘치과보철기공학’을 출간하여 치의학 전공서적 저술 및 출간에 횃불을 들었다. 1977년 1월에 월간치과연구를 창간하고 치과의사 잘 살기 운동으로 서울에 ‘치과의사신용협동조합’설립에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나는 사람이 좋다’는 전부 월간치과연구에 게재됐던 것이다. 별도로 구성된 정순경, 이한수, 김인
올 겨울 국민 모두를 웃고 울게 만든 드라마 ‘응답하라 1998’. 이 드라마에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던 5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필자 또한 매주 금요일 밤을 손꼽아 기다릴 만큼 ‘응답하라 1998’의 애청자였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드라마를 보며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발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모여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옛 추억에 잠긴 적이 많았다.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가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느끼는 고독감이 크기 때문에 옆에서 항상 마음 편히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또한 커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연세대학교 원내생 총대를 맡고 있는 지금, 필자를 포함한 졸업반인 60명의 동기들 모두 임상practice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환자의 내원부터 마지막 치료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본인의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 공부와 임상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일과시간에는 병원 로테이션에, 진료 보느라 바쁘고, 일과 후에는 환자 볼 준비를 하느라 학교에 남아
원장실 책상 옆 창문에 드리운 햇살과 맞은편 건물 사이의 하늘을 보며, 나는 오늘도 계절과 날씨를 느낀다. 봄 햇살이 참 좋고 하늘도 맑은 오늘. 이런 오늘이 내게 감사함을 주고 그 감사함이 전달되어 감사함을 찾게 해준다. 2주 전 쯤에 참석했던 조선치대 여동문회 제7차 정기총회는 아직도 내게 잔잔한 여운과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집과 직장을 오가던 중년의 아줌마인 나는 토요일 오후가 시작될 무렵, 선후배와 동기들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행여나 늦을세라 도망치다시피 치과를 빠져나와 모임장소로 향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선후배,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동기들 덕분에 긴장됐던 마음은 편해지기 시작했고 행사 중 국기에 대한 경례만 하고 앉았다가 국기에 대한 맹세에 다시 일어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일정시간이 되면 길다가도 멈춰 서서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회계 감사보고와 임원 선출 순서에서 깐깐하고 절도 있는 모습은 강하고 믿음직한 외유내강의 부분이 돋보여 같은 여자 입장에서 멋있게 보였다. 손미경 교수님의 국소의치 설계에 대한 명료한 강의, 훈남 후배님들의 멋진 섹스 폰 연주, 재치와 유머로 즐
오후 6시.벚꽃 가득한 교정을 빠져나오는 지금!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아빠는 조금 많은 연세에 3남 2녀 중 막내인 나를 보셨다.‘딸 바보’라는 말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아마 최고 자리를 차지하셨을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막내딸이 태어난 날 너무 기뻐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식사를 대접하신 탓에 잔소리 꽤나 들으셨다 하셨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말을 아끼셨지만 둘이 있을 때에는 속 깊은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으셨다. 덕분에 나도 아빠에게만은 남자친구 얘기를 제외한(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남자친구 얘기를 꺼냈던 날 아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소소한 일들까지 털어놓는 수다쟁이 막내가 됐다. 막내딸이 태어나던 날 아빠의 소원은 내가 10살이 될 때까지 건강히 곁을 지켜주는 것이었단다. 내가 10살이 되던 날 아빠의 소원은 20살까지 나의 곁을 지켜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20살이 됐고 대학생이 된 나에게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생각지 못하셨다며, 축하의 편지와 함께 헤어스타일링기, 그리고 메이크업 브러쉬를 선물하셨다. 10년 후 나의 결혼식에서는 엄마보다 더 많은 눈물을 보이셨고 서운해 하셨다. 아빠는 편지를 참 많이 써주셨다. 사춘기 딸이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략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서로 말씀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대화의 주제가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아버지께 혼났던 적이 있다. “어른들 말씀 하시는데 그렇게 끼어드는 건 안된다”라고 준엄하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름 그때는 “저도 많이 컸는데요”라는 반발심과 함께 언제쯤이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꾸중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갑자기 어른에 대한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다. 첫 번째 다 자란 사람을 어른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선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두 번째 정의인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과연 나는 내 일에 책임을 지고 지금까지 살았던가라는 질문과 사회에서 책임지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어른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정확히
상과대학에서 돈 버는 일을 공부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실상 돈 버는 일을 대학에서 연구해야 하는 학문이 될지 의문스럽다. 돈 버는 일은 일종의 기술이다. 정치도 일종의 기술이듯이, “경제학 개론”에는 “경제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데 반해 정치학은 그렇지 않다. 옛날 예과 시절 정치학개론을 교양과목으로 공부할 때 정치학 개론 교과서에서는 “정치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군중을 선동하고 여론을 수렴하고 —, 이런 것은 다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 초단, 정치 9단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나보다.돈 버는 일도 9단이 있다. 부자 열전을 보면 그 기라성 같은 이름이 모두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했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그들 모두 상도9단(商道九段)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구의 엄친, 영남지역 재단법인체 1호를 등록하신 친구의 어른을 치료해 드릴 때, 평생 재물을 다루시면서 얻으신 재테크의 방법을 일러주셨다. 돈을 세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제 할일에 몰두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돈은 눈이 달려서 만지거나 쳐다보면 도망가는 요물이지만 대의명분을 갖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어느새 모여 들어 온다는 말씀이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신이든 타인이든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런 변화는 지속되는가? 사회생활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관계와 소통은 복잡하고 난해해진다. 이러한 이유를 팍팍해진 세상의 인심과 삭막해진 사람들의 인간미로 돌리는 걸 알아차린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지난 해 한동안 흥행했던 응팔(응답하라 1988)에 심취해 옛날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과도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서로의 긍정적 울타리가 되어 살아가는… 지금의 눈으로는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과거가 아닌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은 어쩌면 몸의 세포 수보다 더 많고 복잡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이세돌보다 더 많은 기보를 입력하고 더 빨리 연산하고 찾아내는 알파고라도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상황 자체보다는 그들이 그 상황을 해석하는 맥락에서 더 좌우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떻게 느낄지는 당사자 과거의 여러 상황과 변수를 다 고려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