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농촌에 대한 기억들뿐이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인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천왕동은 고층 아파트와 지하철역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주거지역이지만 70년대 중 후반까지도 그 곳은 완전한 농촌지역이었다. 하루에 몇 번 없던 버스도 족히 이삼십분은 걸어나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산과 들 뿐이었고 딱히 재미있을 거리는 없었다. 누구나 지루하게 살았음직한 그런 시골동네가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거의 40년 전 그 때의 그 장소로 나를 잠시 옮겨서 잊지 못할 기억들을 몇 가지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사람들을 온통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나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 이면서 부모님께 드리는 반성문이기도 하다. 유리는 깨지는 물건이고 빗자루는 용도가 다양하다 때는 바야흐로 새마을운동의 시기,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넓혀서 관계수로를 확보하고 우물을 정비하고 토담을 이룬 초가집을 계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나의 부모님들도 다른 분들과 함께 마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혼자 남은 무료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하늘에 오로라가 떠야 하고, 오로라를 가리는 장애물(구름)이 없어야 하며, 그 장소에 내가 있어야 한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장소에 가는 일이야 해당 장소로 여행을 가면 되겠지만 현지인이 아니고서야 기상상황이나 그날 그날의 오로라 발생 여부는 여행계획을 세우는 몇 달전에 예측할 수도 없을뿐더러, 게다가 여행일정에 제한이 있는 개업의로서는 거의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머물기로 한 핀란드의 4박중에서 일기예보상 맑은 날은 첫날 뿐이었는데 아주 희미한 오로라만이 떠올랐고, 둘째날은 밤새 비가 내렸다. 새벽에 비가 그쳤길래 동트기전에 나가봤지만 오로라는 감감무소식. 셋째날과 넷째날의 날씨는 일기예보상 흐림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날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마저 있었다. 하지만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핀란드에서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고, 구름이 가득하긴 했지만 하염없이 오로라가 뜰만한 방향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기를 두시간여. 갑자기 저 멀리서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나서는 두껍게 드리운 구름을 뚫고 오로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행 3일차에 비록 구름
구강외과 의사와 당직은 뗄 수 없는 사이다. 매일 밤 부산 경남 시내의 곳곳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상상도 못할 이유로 다쳐서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몽롱하고 희뿌연, 그러나 때로는 숨넘어가도록 급박한 병원의 밤을 당직의는 지켜야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산 시내에 공단이 많아서일까. 유달리 작업 중 발생한 사고로 골절상을 입어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았다. 쇠파이프에 얼굴을 부딪혀 하악골이 골절된 아저씨, 삽량축제를 위한 준비 작업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상악골이 골절된 아줌마, 작업장에서 거대한 쇠사슬이 안면부를 정면으로 강타하여 상하악골 복합 골절상을 입은 21살 청년 등 실로 다양한 이유로 다친 다양한 환자들을 보아왔다. 먹고 살기 위하여 고령의 나이에도 일터에 나아가 작업을 하시다 다쳐서 오시는 분들을 볼 때면 그들을 덮치고 있는 삶의 무게가, 사회의 각박함이 느껴져 마음 한 켠이 먹먹해온다. 2015년 6월 29일. 한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다. 2년차로 신분상승(?)이 이루어져 Back duty였던 날이었다. 1년차 당직의의 전화를 받았다. 작업 도중 낙하하는 돌에 얼굴을 다쳐 출혈이 지속되는 환자에 대한 보고였다
맷돌은 돌로 아래짝 위짝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아래짝 한 가운데에는 수쇠, 위짝에는 암쇠를 끼워 매를 돌릴 때 벗어나지 않게 하고 곡식이나 콩 등을 타거나 갈아서 다른 재료를 만드는 연장이다. 맷돌의 모양새는 우선 윗돌과 아랫돌로 되어 있는데 윗돌에는 망밥을 넣을 수 있게 구멍이 나 있고 옆구리에는 망손, 매손, 어이, 어처구니라고 하는 손잡이가 있고 가운데는 암쇠가 있어 아래짝 수쇠와 맞물리게 되어 있다. 아래짝은 가운데 수쇠가 있고 바닥은 곡물이나 망밥이 잘 타지거나 연마가 잘 되게 매조가 처져있다. 맷돌은 BC 1500~3000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사용됐다고 하며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맷돌의 이름도 다양하다. 과거에는 매, 매돌(재물보), 맷돌, 물명고, 물보(농가월령가), 차마(車磨), 연애(碾磑), 애(磑), 마(磨)(훈몽자회), 마석(磨石)(훙몽자치), 석마(石磨)(해동농서)로 불리었다. 또 지방에 따라 방언으로 가래(제주), 동매(예산), 망(함북, 함남, 평남), 망똘(황해도), 매뚝(전남, 전북), 매(전남, 충남) 등등으로 불리여 왔다. 어처구니없는 맷돌을 생각해 보자. 원래 ‘어처구니’는 명사로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우리 집 아이는 2012년 2월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5살이다. 요즘은 낮에는 유치원에 갔다가 3시경에 집에 와서 엄마나 할머니와 논다.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은 성격이어서 지금까지는 다행히 큰 사고 한 번 없이 잘 지내왔는데, 5살이 돼서부터는 활동량이 많아지고 위험해 보이는 행동도 부쩍 많이 한다. 그래서 항상 조심조심하게 되고,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정말 크나큰 행복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안하기만 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무사히 지나가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면 나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는다. 요즘 들어 아이에게 부쩍 잔소리가 많아졌는데, 이런 나를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많이 하고, 까다로운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일과 관련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진료를 완벽하게 잘 하려고 그렇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면
이립(而立).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가 확립되고 마음이 도덕 위에서 움직이지 않을 만큼 확고하다는 뜻이다.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어느덧 서른이 되면서 마음을 굳건히 하기위해 요즘 나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그리고 행복을 찾아 고민하면 늘 함께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꿈’. 치의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된 나에게 꿈은 무엇이며 이 꿈은 내 행복에 얼마나 기여해 줄 수 있을까.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TV속 오디션 프로그램들. 너도나도 연령에 상관없이 꿈을 좇는 사람들의 땀과 진심을 담아내며 보는 이에게 감동도 선사한다. 처음 프로그램을 접하였을 때는 어린 친구들이 기특해 보이기도 하고 응원하며 보았지만, 언제부턴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이 생겼다. 이 아이들은 어떤 계기로 저렇게 뚜렷한 꿈을 갖게 되었고, 어떤 결심이 저들을 이렇게 끓어오르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다. 무엇하나 명확하게 이것을 해야겠다하거나, 미친 듯이 이 한 가지에 몰두해보아야겠다는 욕구가 부족한 채 그저 학생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학업성적에 몰두하여 지내왔다. 그나마 나는 행운아였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기
저는 신원덴탈㈜ 영업2팀 김종화 팀장입니다. 2015년 12월 21일 새벽 6시반에 화장실에서 갑자기 심한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증세와 식은땀이 났습니다. 큰 병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을 못하고 두통약과 와이프의 간호를 받으며 참다가 오후 동네 종합병원에 가서 MRI 촬영 후 뇌출혈 2곳이라는 판명을 받고, 전문병원인 명지성모병원 뇌혈관 전문병원으로 옮겨서 15시간 수술과 20여일간의 병실생활 후 2016년 1월 18일부터 다시 직장에 출근했습니다. 수술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후유증 없이 회복은 빠르게 좋아졌습니다. 전교통동맥 동맥류 파열에 의한 거미막밑 출혈 및 뇌실내 출혈이었으며, 한국표준질병 분류번호는 I60.2였습니다. 몇 명에게만 연락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병문안 와주셔서 감사했으며 항상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생활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수술후 휴유증으로는 성대결절로 한달동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객들이 주문할 때면 답답해 했습니다. 저는 문자로 주문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며, 친한 거래처는 매우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병실생활하면서 느낀 건 현재도 많은걸 가지고 있고 행복한데, 그것을 모르고 많은 욕심을 부리며 살았다고 생각했
지금 내 나이 사십대 중반이 되었다. 시골에서 부유하지 않은 오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북적거리는 형제들 사이에서 여타 아이들처럼 자랐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년시절의 극소심한 성격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활달하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변화도 타인이 아닌 자신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고 삶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생각과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물론 부모님과 형제들의 울타리 안에서 보고 배우면서 자랐겠지만 흔한 “공부 좀 해라” 라는 말씀 한번 들은 적 없이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자존심, 자존감, 자신감 등 자아와 관계된 단어들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어서, 솔직하고 직설적 화법은 친구들이나 선후배로부터 ‘독특한 친구’란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운 좋게도, 독특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필자가 지금까지의 인생의 곡선을 되짚어보면 완만한 우상향 곡선을 그린듯하다. 물론, 몇번의 힘든 경우도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잘 헤쳐 나왔으니 말이다. 요즘 세대들 말로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개원 초기, 허접한 낡은 치과의원에서 실력없어 보이던, 자기주장 강하고 직설적 화법, 자부심 강한 치과의사는 환자와 트러블
“잠시 조사 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운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경찰차가 집 앞에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남녀 경찰 두 명이 성큼 앞정원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갓 스무 살이 넘었을까 말까한 아주 앳된 소녀티가 물씬 풍기고, 남자는 40대의 몸집이 거대하고 씩씩한 생김새의 경찰이다. 푸르름이 절정을 이룬 초여름 잔디밭 위에 잘 다려 입은 카키색 제복과 붉게 물든 석양빛에 번뜩이는 은색 계급장이 사뭇 위압감을 풍겨 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민의 요청도 없이 경찰이 출동하였다는 것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말소리에 바짝 긴장이 느껴진다. 이곳 영국에서는 고사하고 한국에서도 접해 보지 못하던 일이다. 더욱이 내가 살던 런던 근교 ‘스테인스’라는 동네는 템즈강 상류 쪽에 위치한 조용하기 그지 없는 마을이라 일년 내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다.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강위에는 하루 종일 형형색색의 보트들이 유람을 하고 군데군데 젊은 청춘들이 카약위의 노를 젓는 곳. 그 사이사이를 몸집이 꽤 큰 백조들과 새끼들이 함께 떼를 지어 어디론가 유유히 헤엄쳐 가기도하는 그런 평화스런 곳이다. 집 앞쪽으로는 커다란 잔디밭이 딸린 앞 정원
사실 나는 케이크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앙금설기 떡케이크 아이템을 제안 받았을 때 글쎄 별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미루다 문득 생각나 블로그를 뒤져 앙금설기 떡 케이크를 찾아보니 전에 알던 떡 케이크와 다른 파스텔톤의 꽃장식이 너무 이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케이크이었다. 이걸 직접 만든다고? 하룻저녁에 할 수 있을까?… 흠…원데이 클래스도 있네. 그래 한번 만들어 보는거야 우리도 눈의 호사를 한번 누려 보는 거야. 마침 어린이날 어버이날도 다가오고! 의미도 있네 있어! 만들며 수다도 떨고 얼마나 재밌을 거야. 그렇게 시작된 앙금설기 떡케이크 만들기. 1부는 설기떡 만들기로 쌀가루, 물, 설탕, 소금 배합비율과 부드럽고 촉촉하게 찌는 방법을 강의 및 시연으로 보여주고 2부는 백앙금과 식용색소를 섞은 생크림(앙금으로 만들면 팔이 아파 다음날 진료에 지장을 줄수 있으므로 좀 더 부드럽게 만든)으로 설기 떡 위에 올릴 꽃을 만들기 위해 동영상과 그룹 및 개인지도가 세분의 강사님과 함께 진행됐다. 역시 치과의사들은 손재주가 있다. 라넌큘러스와 카네이션 두 가지 꽃을 만들어 설기 떡 위에 올리고 빈자리에 푸른 색 잎을 짜넣고 가장자리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트루먼쇼’를 처음 시청하고 난 뒤 긴 여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초등학생이였던 필자가 이따금씩 공상하곤 했던 내용이였기 때문이였을까. 영화를 본 후 며칠간은 하늘에서 갑자기 조명장치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시도때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숨겨진 곳에 카메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물건들과 괜한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웃음이 나오는 순간들이지만, 그 어린나이에도 내가 볼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역시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더 크면서 접한 조지 오웰의 ‘1984’나 ‘메트릭스’ 같은 작품들은 “나”와 내가 속한 “세상”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상상 속에나 있을 법했던 영화와 소설 같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 세상과 큰 차이가 없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인터넷과 같은 통신수단의 혁신적인 발전과 보급은 그들이 그저 통신수단만이 아닌 일상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하였다. 그 중 Social Network Service (SNS)의 비약적인 성장은 개인의 일상이 더 이상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공의 영역으로 공개될수 있도록 하였고,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