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커피는 달달한 음료라고 생각했다. 처음 어머니께서 드시던 커피를 한 모금 뺏어먹고 나서는, 나는 어머니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종종 때를 쓰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커피보다는 어린이용 커피라면서 코코아를 마시기를 권유하셨지만, 어린 내 입맛에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종종 커피를 타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커피믹스의 프림이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셔서 인스턴트커피 가루에 우유를 잔뜩 넣고 설탕대신 꿀 가루를 타서 주셨다. 어릴 적에는 뜨거운 음료를 싫어했기 때문에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차갑게 마시거나 냉동실에 넣어두고 얼려먹곤 하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을 때는 얼린 커피우유만큼 맛있는 간식이 없었다. 빨리 얼려 먹고 싶은데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30분마다 냉동실문을 열어서 얼어있는 부분을 먹고 다시 얼리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고등학생이 되어서부터는 커피는 어릴 적의 먹고 싶어서 안달 났던 음료의 모습은 아니었다. 졸음을 쫓아주는 음료였고 어머니께서 타주시는 커피가 아닌 커피믹스나 편의점 캔 커피의 형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릴 적만큼 커피를 그 자체로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달달한 믹스커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거리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 “그 때 왜 그랬을까, 그렇게만 안했어도…”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경험은 다들 해봤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 때 정말 잘 선택했어, 다른 걸 선택했으면 큰일 날 뻔 했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경우도 있다. 며칠 전 휴가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창 인기 있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최근까지 시청해서 그런지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하며 우리의 대학 시절인 2002년도를 추억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창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공부와 축구 응원 사이에서 고민했던 사소한 선택의 순간도 아직 기억난다. 이렇게 옛 추억에 잠겨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친구가 얘기했다. “학생 시절 ○○ 자동차 연구 장학생으로 졸업 후 입사를 코앞에 둔 시점에 그 당시 ○○ 중공업 취업 조건이 더 좋아서 연구 장학생을 포기하고 취업했었는데 요즘 들어 후회된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 자동차의 연봉과 삶의 질이 더 높기에 하는 넋두리였다. 또 다른 친구는 8년 간 다니던 회사를
비오는 토요일, 저는 치과에 출근해 있습니다. 진료는 안하고 이것저것 밀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사는 가르치는 업무만 있어 보이는 것처럼 치과의사도 진료만 한다고 환자들은 생각하겠지만 개인치과 원장으로 진료 외 사무, 행정업무, 공부, 연구 등 일이 많습니다. 평소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곤 하는데 치과의료윤리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사회에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집단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집단 전체의 윤리문제가 부각된다는 것은 뭔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지 않을까요? 그 집단이 윤리성이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람만으로 구성돼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특정 직업군의 윤리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직업관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치과의사가 되려 하는가? 우리의 직업은 사회에서 남을 도와줌으로써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기여를 하고 책임성이 높은 만큼 더 많은 사회적 기대와 존경을 받는 것 아닐까요?그러나 이러한 기대 속에서 우리가 경제적 보상만
따르르릉~ 새벽 4시에 웬 전화일까?‘여보세요-’ ‘------ 잣 뎄구나. 자는 데 깨워 미안 하구만—’‘----’‘나 --- 미안한데 지금 좀 와줄 수 있갔어? 의논 할 말이레 있어서 말이야—’피안도 말씨 매부 전화다. 무슨 일일까 어제 저녁 뵀을 때 무겁던 표정이 맘에 걸린다.매부를 처음 만난 때는 1953년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해 7월 27일 휴전으로 한국전쟁이 마무리 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께서 휴전으로 이북에 송환될 인민군 포로 중 자유 대한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반공 포로’를 석방한다고 선포 하셨다. 유엔군사령부는 절대 반대였지만 수용소 철조망이 군데군데 제거되고 국군 헌병의 엄호 하에 인민군 포로를 석방 탈주 시켰다. 유엔군은 무장 지프차로 탈주 포로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석방된 반공포로는 수용소 인근 주민들이 동포애를 발휘 전원 은신을 도와주었다. 이런 까닭에 유엔군 M P 수색대는 단 한명의 반공포로도 찾아 내지 못했고, 또 그들 역시 수색만 할 뿐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인민군 반공포로 석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참으로 위대하신 결단이다. 이승만 대통령 덕에 우리 식구가 된 훗날의 매부는 반공포로 석방까
관악구에 개원한 지 언 28년이 다 돼 가는 가운데 주위의 후배 치과 선생님들과 점심을 1주일에 한두 번씩 먹은 지도 비슷하게 된 것 같다. 요사이에는 직원 걱정, 환자 걱정으로 젊은 선생님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다사다난한 우리 치과계도 빨리 안정돼 화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글 쓰는 재주가 특별히 없어 가끔 기분 전환하기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권해보고 싶다. 이전에 경기도 양평에 친척 초가집이 있어 40대 나이부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님을 모시고 장작불 때는 재미로 자주 들락거렸다. 올림픽 도로를 타고 미사리를 지나 퇴촌 방향으로 가면 좌측으로 팔당댐이 보이고 호수를 따라가다 보면 분위기가 호젓하다. 광동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30여분 가면 우측에 바탕골 미술관이 있다. 전에는 백남준 작품과 어린이 공작실이 있었다. 가족이 관람하기에 부담이 없다. 이어서 강상면 방향으로 직진하면 좌측에 힐하우스라는 넓은 정원을 가진 레스토랑이 있는데 남한강을 조망하며 야외에서 아이스크림, 커피를 마시며 쉬기 좋다. 시원한 남한강 바람에 가슴이 확 트인다. 다시 직진하면 양평대교가 나오고 건너면 좌측에 들꽃수목원이 나온다. 남한강 강변에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수목원에 꽃이
직접 만든 앙금 꽃 떡을 들고 예쁜 후배가 찾아왔다. 새내기 치과의사로 새로운 출발을 위해 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자 찾아왔다. 덕분에 지나온 치과의사로의 삶을 되짚어 보게 된다.처음 개업한 1980년대 당시만 해도 여자 치과의사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그 시절 개원가에서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졸업 후 대부분 개업을 하였고 개원은 그런대로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개업 준비하면서 재료공급 사장님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여자니까 힘든 발치나 틀니 같은 것은 하지마시고, 어린 애들이나 치료해주시면 딱 좋을 것 같으니 그리하라 했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린이 치료가 제일 힘든 영역이라 내 손자는 소아치과 전공한 후배 선생님의 몫이 되었다.개업의로서 36년이란 세월을 보냈고 뒤돌아보면 강산이 3번이나 변했으며 4번째 변하고 있는 강산을 생각해 본다. 앞으로는 더 많은 학문과 재료 그리고 경영의 빠른 변화가 얼마나 많이 올까? 그 변화를 인지하고 빠른 적응을 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이를 수용하여 행하는 치과의사로서 삶을 살아가야만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니 힘에 부쳤던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
매일매일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살아가야 할 소명을 갖고 사는 우리 치과의사들!환자들의 컴플레인에 집중해서 살다보면 하루가 어둡고 우울해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긍정과 부정, 행복과 불행이 양면처럼 존재한다. 우리가 어떤 쪽을 선택하고 주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하루는 달라지게 된다.난 가능하면 밝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행복한 순간이 늘어나고 어느새 난 행복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을거라 믿는다.난 행복한 순간을 늘리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한다. 이런 노력 중의 하나가 만나면 즐겁고 마음이 치유되는 여후배들과의 만남이다.처음엔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지역에서 개원했다는 것만으로만 모임을 시작했지만 지금 나에게 후배들은 언제나 만나면 반갑고 안보면 보고 싶고, 힘들 땐 의지가 되는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자매 같은 그런 존재이다.25년전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한번도 와본 적도 없는 안산이라는 도시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십대의 패기로 용감하게 개원을 했다. 자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현실은 버거웠다. 직원채용 문제, 환자와의 갈등, 진료의 어려움, 행정상의 문제 등등. 이런 문제들을 의논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고
4년 전 6살 꼬마 아가씨가 치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치과 오기를 무서워하며 고사리 같은 손을 오돌오돌 떨며 울던 꼬마 아가씨. 진료실에 들어오기 싫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흔드는 아이를 보며 엄마가 “지영아! 치료 받아야지”라고 타일렀다. 바로 그때 한참을 울던 아이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획 돌리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지영이라 부르지마! 강아지라고 불러!”살짝 미운 6살 꼬마 아가씨의 말에 아이를 쳐다보고 있던 나를 비롯한 치과 직원들은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4년이 지난 며칠 전 그 꼬마 아가씨가 치과를 다시 방문했다. ‘강아지’라 불러달라며 울고 있던 아이의 얼굴은 그 때 그 얼굴 그대로였지만 키는 한 뼘 반 이상은 큰 것 같았다.얌전하고 수줍은 미소로 치과로 들어서던 꼬마 아가씨 ‘지영이.’ 지영이와 눈을 맞춘 나는 “지영아, 선생님 기억해? 그때 우리 지영이 치료 잘 받아서 토끼 인형 만들어줬는데~ 기억해?”라고 물었다. 지영이는 누가 토끼인형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토끼인형을 준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4년 전 치료를 안 받겠다고 울고 떼를 쓰고, 화를 내던 그 때의 지영이는 어디가고, 밝게 웃으며 스스로
고대로부터 치의학은 의학의 일부로 여겨졌고 미용적이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삶에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구강 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필요한 처치 방법을 알지 못하여 구전된 방법으로 처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처치 방법이 어떠한 기전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다양했지만 희박했으며 이론적인 배경보다는 처치하는 이의 명성에 기대거나 종교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내과의에 의해 경시되던 치과 치료가 현대 서양 학문의 형태를 갖추는데 18세기 프랑스 의사 피에르 포샤르의 역할이 지대했다. 피에르 포샤르는 치과 치료를 학문의 형태로 발전시켰지만 질환의 원인을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체액설’에 기댔기 때문에 백여년 뒤 루이 파스퇴르가 실험을 통하여 증명한 세균설을 기준으로 본다면 비과학적인 접근을 했다고 할 수 있다.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의학적 지식을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경험 의술로부터 얻었기 때문에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해하기 힘든 주장도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치과와 관련하여 설명한 내용은 많지 않지만 그 가운데 ‘남성은 여성보다 치아의 개수가 많다’라는 주장은 눈길을 끈다. 이 주장은 이 후 이천년에 걸쳐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
어릴 적 동네에 대형마트가 처음으로 생겨 가족끼리, 친구끼리 구경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었던 적도 있었다. 아파트 분양 광고에도 부지 인근에 대형마트가 있다는 것이 엄청난 장점인 것처럼 부각하여 광고를 하는 요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마트가 있는 건물에는 음식점, 안경점, 세탁소, 커피전문점, 심지어 영화관 등 마트 안에서 어지간한 일들은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되어 버렸으니, 생활에 편의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언제부턴가 나도 장을 본다는 것은 마트를 같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고, 시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가 본 일이 손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내가 대형마트를 자주 찾게 된 것은 단지 깨끗한 실내에서 잘 정리된 물건들을 보고 살 수 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소한 기본은 되는 듯한 품질의 상품을 더 싸게 산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 같다. 특히 1+1의 유혹은 하나 가격에 두 개의 물건을 ‘득템’한다는 심리 때문에 굳이 2개가 필요 없는 음식, 또는 물건이라도 카트에 담고 나선 필요한 것이었는데 싸게 잘 사는 것 같다고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비는 창고형 마트에서 더
아침에 잠을 깨우는 것은 햇빛이 아니라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이다. 도심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창으로 방음을 하고 있지만 고요한 정적을 깨우는데 소음이 일등 공신일 수밖에 없다. 출근을 앞두고 아내의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며, 아이들의 등교나 출근을 위해 동분서주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낀다.일단 집 밖으로 나오면 더욱 커지는 자동차 엔진이나 경적소리에 그리고 지하철 레일이 미끄러지면서 터널의 고요함이 굉음으로 들릴 뿐 아니라 안내방송에서 나오는 멘트에 나의 귀는 혹사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모자라 핸드폰의 동영상을 보기 위해 이어폰까지 끼고 있노라면 귀에 압박과 주변의 시끄러움으로 고통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바야흐로 소리로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진료실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환자 앞으로 다가간다. 치료를 위해 돌아가는 핸드피스의 회오리같은 소리는 보철, 임플란트라는 큰 수입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다지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아름다운 악기소리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내 귀는 계속적으로 혹사 당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쉴새없이 움직이는 suction소리까지. 진료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