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 전 대전 MBC 사장이 타계한 지 어언 3년인데, 가끔 그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은 전부터 알았지만 파탈하고(신흥초등 대전중ㆍ고 서울대 모두 4년 후배) 자주 만난 건 2010년경 부터다. 상배(喪配: 2007)한 후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대전공원 아내 묘를 찾던 열부(烈夫)가, 가까운 동기 월례모임에 필자를 초청한 것이다.
<삼국지>하면 적벽대전 때 양측사상자 숫자까지 뚜르르 꿰는 기인(奇人)인데, 뭐에 필이 꽂혔는지 올 때마다 필자를 꼭 불렀고 술 한 방울 못하면서 좋은 포도주를 서너 병씩 들고 왔다. 모임에 얽힌 추억 중에, 게스트로 초청한 미국인 교수와 필자가 카페 ‘팔로미나’에서 벌인 팝송 따라 부르기 대결(?)을 기억한다. 하루는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시집 《아내의 묘비명(銘)》을 몇 권 가져왔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가슴이 먹먹했는데 이튿날 집사람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육십 넘은 아마추어의 첫 시집이 이토록 감동을…. 그래서 시의 생명은 ‘진정성’에 있다던가? 얼마 뒤 4천 권 넘게 팔렸다면서 아마추어 시집으로서는 베스트셀러요 기적이란다. 곁들여 보도국장 시절에 들은 ‘사재기’ 관행을 얘기한다.
많은 출판사들이 책을 직접 사들여서 판매 부수를 늘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든다는 것이다. 불과 몇백 몇천 권으로 조작이 가능하다니, 우리 국민이 얼마나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것인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제 보도를 보니 고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 사재기에는 20억이 들었다고 한다(2007). 좁은 시장에 뭐 좀 된다 하면 모두가 우르르 몰려 제 살 깎아 먹으며 부당경쟁을 하다가 함께 망한다. 재벌업체들의 영세업자 거덜내기나 사무장 치과 체인의 싹쓸이처럼 비겁한 상(商)행위다.
황석영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영등포에 정착하고, 4.19 당시 관자놀이에 관통상을 입은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방황을 시작한다. 고교 때 《사상계》에 단편으로 등단. 동국대 철학과 - 해병대 입대 - 베트남전 참전 후 해남ㆍ광주에서 현장 문화운동을 한다. 1974년부터 10년간 대하소설을 한국일보에 연재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고, 광주항쟁 3인의 기록을 글로 옮겨 세상에 알렸으며,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1989), 김일성을 몇 차례 만나고 ‘재간둥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베를린 등지로 5년간 망명 생활 끝에 귀국, 자수하여 5년간 복역한 뒤 1998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2009년 5월에는 MB의 중앙아시아 순방길에 동행하였다.
그의 행적과 작품세계를 보면, 치열하게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체험으로만 글을 쓰는 행동파(Activist) 작가요, 사상에 오염되기보다 직관(Intuition)에 따라 현실에 참여하는(앙가주망) 적극성에, 민족의 격변을 함께 겪은 동갑내기로서 존경심을 느낀다.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경력은 타고난 천재성과 함께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귀중한 자산으로서 많은 젊은이의 롤 모델이 되었으니, 이제는 독자와 후진을 위하여 신중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알제리의 유령들>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은 딸 여정 씨는, 출판사 ‘김영사’에서 인문 서적을 편집하고, 부인 홍희담 씨도 소설가다. 자신은 평생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니 가히 문학 가족인데, 과연 출판계의 오랜 관행 책 사재기를 ‘몰랐을까?’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시비 당시 작가는 그 출판사에서 다시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절판선언과 함께, “나는 사재기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런 추문에 연루된 자체가 내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치욕”이라 했다(2013. 5.). 스타작가로서 구겨진 자존심의 회복과 나쁜 관행의 퇴출은 당연하지만, 툭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설정은 TV 막장드라마만으로 충분하다. 조금만 더 너그럽게 살자.
임철중 치협 전 의장
-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 치문회 회원
-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역임
- 치과의료문화상 수상
- 저서 : 영한시집《짝사랑》, 칼럼집《오늘부터 봄》《거품의 미학》《I.O.U》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