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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이 고추

임철중 칼럼

과학기술계 은퇴자를 위한 시설 사이언스 빌리지는 영양가를 철저하게 계산하여 윤번제 식사를 제공한다. ‘맛’만 빼면 불평도 불만도 없다. 집 밥 개념이라지만 주방장이 젊으니 결국 퓨전 한식이다. 예를 들어 청국장이라면 숟가락을 꽂아서 슬로모션으로 넘어질 만큼 되직해야 제 맛인데, 그냥 멀건 장국이다. 하기야 고령자를 위한 염도(鹽度) 0.6 언저리의 저염 저당 식에 맛까지 주문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다.

 

그래서 밥도둑 아삭이를 따로 준비한다. 한국인의 고추 사랑은 유별나다. 남아선호 얘기가 아니라, 짱꼴라(中國人)들이 제아무리 우겨대도 포차이에는 없고 김치에는 있는 것이 고춧가루요, 금메달을 따도 ‘고추장 뒷심’ 덕분이라고 하지 않던가?

캡사이신의 효능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지 오래다. 풋고추는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앙칼지게 매운 청양고추는 쫑쫑 썰어서 양념으로 쓰고, 중간 정도의 꽈리 고추는 조림용이며, 껑충 큰 아삭이는 그냥 된장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키 크면 싱겁다더니 아삭이는 과연 이름만 고추다. 아작 깨물면 아삭 씹히는 식감과 달콤한 감미, 그리고 삼킬 때 가서야 톡 쏘는 뒷맛으로 겨우 이름값을 하는데, 가출한 입맛을 불러오는 데는 그만이다. 문제는 단 두 식구가 먹다 보니 한 근이 한 달을 가고, 냉장고 안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보니 물렁이가 생긴다. 아삭하지 않은 아삭이는 싱거운 소금 아닌가? 결국은 옆집과 나눠 먹고 장 한 번 더 보기로 해결을 보았다.

 

베스트셀러나 대박 영화는 대중의 ‘공감’을 보여주는 증거이므로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에 매우 유용하다. 영화 ‘Rat Race’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숨 가쁘게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이들, 현대의 소시민 얘기다. 1950년대의 브로드웨이 풍경을 보여주는 귀한 장면이 많은데, 이 영화 제목은 ‘날 선 경쟁’보다는, 똑같은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을 나타내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지나고 보면 만사가 다 허무한 것을 왜 아등바등 다투며 사는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때로는 덧없고 갑갑한 일상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거나, 제행무상을 부르짖으며 속세를 떠나 ‘해탈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희랍인 조르바’도 종교영화에서 보는 성인도, 보통사람들이 사는 ‘삶’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들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물음에 ‘부분적인 대답’일 뿐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대다수를 마치 범생이처럼 낮추어보는 시각은 여전하여,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고 남가일몽이 있으며 장자의 호접몽이 있다. 이처럼 인간의 일생을 조명하는 이야기는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는데, 이를 단 하루로 압축하여 보는 상상력을 작품에서 종종 만난다.

 

코미디 ‘사랑의 불랙홀(Groundhog Day)’과 코믹 호러 ‘Happy Death Day’ 그리고 S F-액션물 ‘Edge of Tomorrow’ 등등... 마멋의 일종인 Groundhog는 매년 2월 초에(위도 차이가 있지만 대략 立春과 일치) 동면에서 깨어나, 제 그림자가 보이면 꽃샘추위와 늦은 봄을, 날씨가 흐리면 따뜻한 봄을 예상한다고 한다. 세 편의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각 알람 소리에 깨어나, 똑같은 일상을 겪은 뒤에 섬뜩한 최후를 맞는다.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미리 아는 두려움도 반복되는 악몽이지만, 더 무서운 사실은, 누구나 꿈꾸는 영생(永生)이 알고 보니 축복이 아닌 저주라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바로 미지의 내일이 오지 않음을 의미하니까...

 

몇 번을 죽어도 쳇바퀴 돌듯 다시 깨어나는 꿈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많은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 결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지겨워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 실은 극히 소중한 것이며, 말 그대로 ‘삶 자체’라는 단순한 진리를, ‘코로나 계엄’이 극명하게 일깨워주었다. 늘 집 안에 있던 파랑새를 이제야 알아본 것이다. 천재는 노력가를, 노력가는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일상의 지루함을 즐기자. 국민을 위한다며 의보수가는 저가로 묶어놓은 채, 필요할 때만 고소득층으로 몰아 소모품 취급을 하더라도, 우리의 천직을 사랑하고 직원들과도 한 번 더 미소를 주고받으며 살자. 수수 덤덤한 꽈리고추 조림은 두고두고 먹지만, 상큼한 아삭이에 너무 집착하면 끝내 물렁이를 만든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