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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學者)와 술자(術者) 사이에서

시론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 건물이 증축되면서 증축된 건물 1층에 빵집이 하나 들어왔다. 그래 봤자 빵 맛이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하면서도 그 가게가 개업하면 한 번 빵을 사서 맛보고 싶었다.

 

개업하는 날, 개업의 여파인지 줄을 서서 말도 안되는 비싼(?) 가격 느낌의 빵을 사서, 방에 와서 커피와 함께 한 입 먹어보았다. 점심 시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인데도 꾸역꾸역 빵 하나를 다 먹는 필자를 스스로가 놀라는 순간이었다. 필자의 속마음은, “진짜 맛있다.” “와, 그 가격의 금액을 받을만하다.”라는 감탄의 말이었다. 가게 점주가 왜 그렇게 높은 월세(?)에도 불구하고, 증축 건물의 1층에 자리잡은 근거를 알 수 있었다. 필자는 그 빵집의 빵 굽는 분을 “Pro-Patisserie(전문 제과. 제빵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년(停年)의 시기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다가, 병원 측으로부터 그 시기를 통보받고,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필자와 같은 ‘임상교수’들은 ‘정년’이라는 용어보다는 ‘계약만료’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한데, 병원 측의 표현상의 배려로 그리 표현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떠오른 생각이 필자는 ‘학자(學者)’였는지, ‘술자(術者)’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학술(學術)이란 단어는 학문과 기술을 의미하며, 우리 치과의사들은 ‘학술대회’ 등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학문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학자’라는 단어는 ‘대학’에 어울리는 단어이고, ‘술자’라는 단어는 ‘진료’에 어울리는 단어로 보인다. 능력이 탁월한 선후배님들 같았으면, ‘학자’였으며 ‘술자’였다고 자타가 모두 인정할 수 있었겠지만, 필자는 그런 능력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으로 배양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여러모로 부족한 필자가 지니고 있는 직함 덕분(?)에 학술상과 같은 시상을 준비하는 과정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1년에서 3년에 걸친 기간에 자신들이 주저자로 참여한 논문 편수가 10편~30편의 SCI(SCIE)에 이르는 신청자들이 즐비하다.

 

필자의 경우, 1인 연구원의 자격으로는 연구비도 제대로 배정받기 어려울뿐더러, 1년에 한 번 정도 IRB(임상시험기관윤리위원회)에 임상시험 연구계획서와 자료를 제출하여, 겨우 승인을 받아 논문 한 편을 쓰고 제출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꼬박 1년이 걸리니, 앞서의 1년에 10편 가량의 세계 유수의 학술지 게재 논문을 쓰는 교수들이야말로, 세계적인 ‘석학(碩學)’의 반열에 들게 해도 필자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수상을 신청한 교수들이 해당 대학에서 유별나게 천재적인(?) 교수들이 아닐 터인데, 신청을 하지 않은 교수들 대부분도 이에 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유추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고, 이를 근거로 기본적으로 현재 치과대학이나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교수들은 ‘학자’의 반열에 올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요즈음은 개원의로서도, SCI(E) 급의 논문을 1년에 한 편 이상 게재하는 원장들에 대한 근황도 치과전문지에 기사가 올라오는 것을 볼 때에는, 이런 분들이야말로 개원가보다는 ‘대학’에 계셔야 하는 인재라고 생각하곤 한다.

 

규정상 수련치과병원에서 ‘예방치과’가 전문과목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예방치과전문의 1인당 연인원 1,000 증례 이상을 보고해야 한다. 얼마 전 ‘수련병원 실태조사’에서 보고했던 자료를 살펴보면, 최근 5년간 필자가 근무하는 예방치과의 증례가 매년 연인원 1,400~1,900 증례 정도이니, 그 동안 예방치과 전문의인 필자 혼자서 열심히 환자에게 예방처치를 해 온 셈이 된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인턴을 제외하고는 전속 수련의는 물론이고 전속 치과위생사도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로 필자가 직접 스케일링과 같은 위임가능한 진료에까지 열중하면서 이 증례들을 달성한 결과이니, 그냥 예방치과 진료가 좋아서 진료하는 필자는 앞서의‘학자(學者)의 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술자(術者)’의 편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술자’는 ‘술자’이지만, ‘학자’의 옷을 벗지 못하고 그 옷을 걸치고 있는 불편한 모습의 ‘술자’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스승은 그릇이 부족한 필자에게 ‘학자’가 되기 위한, ‘학문(學問)’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신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의욕만으로 ‘학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인력’과 ‘system’, ‘재원’ 등의 환경 요소들이 가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요소들이 지원되지 않는 환경에서 필자가 ‘학자’의 꿈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보고, -물론 이는 패자(敗者)의 구차한 변명이지만- 이제는 노래 가사에서처럼 ‘Whisky on the rock’ 잔에 있는 얼음이 녹는 모습을 바라보며, 꿈이 사라지는 느낌을 느낄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전국 11개 치과대학 및 치전원에 개설되어 있는 예방치과에는 이런 제반 요소들이 어느 정도 구비되어 활발한 연구와 업적이 만들어지고 있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후배들이 부족한 선배가 이루지 못한 꿈을 훌륭하게 이루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병원에 온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가끔 개원 시절에 필자에게 진료받았던 환자들이 필자를 찾는 경우가 있어, 옆에 서 있는 수련의에게 환자의 History를 설명해 주곤 한다. 이 보철물은 20년 넘은 Cr & Br이고, 저 환자는 20년 전에 Full Mouth Rehabilitation을 한 후, 현재까지 계속관리되고 있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니에 충전해 주었던 아말감 충전을 다시 해 주는 것 밖에 없다는 말도 해 주었다.

 

예방치과를 전공한 필자가 보철진료를 뛰어나게 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당시 보철물 제작을 도와준 치과기공사의 세심한 기술과, 좋은 재료, 그리고 술자와 환자가 조화를 이룬 결과라고 생각하며, 여기에 더해 필자의 전공인 “계속관리”를 철저하게 해 주고, 환자가 이를 잘 지켜준 덕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환자에게 전문가다운 노력을 하는 ‘술자’로서의 책임은 다한 듯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필자의 길에 동참하라고 요구하거나 해서, ‘죄없는 치과의사 후배들이나 치위생학과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자제하고, 그간의 연구결과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들을 후학들과 진료소비자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근거와 방법을 제시하고자 준비 중이다. 정년까지 남은 1년 남짓의 기간을 이렇게 바쁘게 보내는 것이, 예방치과 전문 분야를 전공한 ‘술자’의 마지막 Mission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