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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년생

스펙트럼

안빈낙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장에서 가까운 강릉 시내를 벗어나 한가로운 해안가 마을에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넘었습니다. 간조에 맞춰 모습을 드러낸 바위로부터 고동을 따는 일은 예사가 되었고, 항구 옆 수산시장에서 살이 꽉 찬 홍게 다리를 저렴하게 쪄다 먹는 제법 현지인다운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작년부터는 농촌 생활에 부쩍 관심이 커져서 차로 10분 거리인 허브농장에 작은 공간을 배정받아 몇 가지 작물을 재배해보고 있습니다. 씨앗을 발아시켜 모종으로 키운 뒤 물빠짐과 영양을 고려해 잘 다져놓은 땅에 정식하여 식용 허브를 기르고 또 식탁에 올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값지지만, 그로부터 쉬이 얻을 수 없는 성찰까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던 바질허브는 겨우내 바짝 말라 한해살이를 다하곤 가지로부터 수많은 씨앗을 배출하여 올해의 모종으로 거듭났고, 그 외 다양한 다년생 허브들은 월동에 성공하여 푸른 새잎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 세이지라는 허브는 꽃망울이 잔뜩 올랐는데, 젊은 농장주가 그조차도 씨앗에서 시작된 다년생 세이지의 꽃망울은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진귀한 모습이 기특할 따름입니다. 

 

다년생 작물의 매력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해에는 초록으로 무성하게만 크던 식물들이 이듬해 새순이 얼마 나오지도 않은 주제에 모아둔 내공을 한 번에 분출하듯 매력을 뽐내는 것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로즈마리, 차이브를 비롯한 여러 작물이 예년보다 더 강한 향내를 풍기며 뻗어나오는 모양새로 볼 때, 올해도 풍작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 농장에서 첫 걸음마를 뗀 아들은 이제 두 돌이 가까워 ‘다년생 인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여러 면에서 짐승에 가까운 녀석인지라 아빠의 농작을 돕겠다며 다가올 때마다 식겁하곤 하지만, 예년과 다르게 꽃피고 향 나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어찌나 기쁜지 모릅니다. 곤히 잠을 재우고 옆방에서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저 역시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초보 아빠이지만 ‘다년생 아빠’가 되었으니 노쇠하다기보다 성숙해진 구석이 어딘가 있겠거니 막연히 자찬해봅니다.

 

일터에서는, 전문의 자격 취득 이후 전임의사로 일한 지 두 해째가 되었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진행중인 강릉시내 사회취약계층 아동·청소년 구강건강증진사업의 대상 학생들을 다시 불러 검진하는 과정에서, ‘다년생 전임의사’의 작년 한 해 성적이 썩 괜찮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가장 주요한 지표로는 치아홈메우기를 제공받은 학생들의 대구치 치료필요도가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고, 부수적으로는 실란트가 탈락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강원권역 장애인 구강진료센터의 겸임근무 또한 해가 거듭됨에 따라 보다 확신있는 진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예방치과 전문의로서, 비장애인의 예방관리와 장애인의 예방관리에 어떤 간극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 진료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즉 환자중심적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여 환자 및 보호자와의 관계 맺기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환자와의 라포가 깊어져 전신마취보다는 당일진료로 해결하는 일이 많아졌고, 예방관리를 위한 중재적 방법을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적용하는 일이 수월해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년생 식물이나 인간이나 월동 시기에 흙을 덮어 보양하고 땅이 녹을 때 양분을 주어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동일하겠습니다. 제 경우 고작 5년차의 ‘다년생 치과의사’에 불과하지만, 수련 과정에 만난 많은 선후배의 보양과 가정에서의 양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다년생 치과의료인’들께서 각자의 보양과 양분을 바탕으로 여러 방면의 성장을 거듭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