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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서의 정체성: 치과의사로서의 identity, version 1

스펙트럼

얼마 전, 교수님께 영광스러운 발표 자리를 하나 제의받았다. 바로 치의학교육학 학회에서 학생을 대표로 발표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대단한 발표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모범이 될정도로 바른 생활을 해왔다고 당당히 말하기엔 부끄러운 내가 교수님들 앞에서, 그것도 “학생”을 대표로 서야한다니. 부담은커녕 이 기회 아니면 평생 있을까 싶어서 단숨에 하겠다고 말씀드리고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부담이 몰려왔다. 다행히 발표는 큰 탈 없이 마무리했고 걱정한 바와 다르게 교수님들께서 귀엽게 봐주신 듯하다. “치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제로 발표했던 그때의 발표문을 부끄럽지만 여기에 공유해보려 한다.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최예슬이라고 합니다. 발표에 앞서 다른 훌륭한 학생들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서 발표할 수 있음이 정말 영광입니다. 처음 교수님께 발표 제안을 받았을 때,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생각하여 기쁜 마음에 기꺼이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아직 한참 부족한 제가 과연 학생들을 대표해서 “치과의사, 치과대 학생의 정체성”을 주제로 감히 말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어 함부로 원고를 시작하지조차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치의신보의 스펙트럼 집필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 덕분에 이때까지 기고했던 저의 글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쓰는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뒤돌아서 읽어보니 그 당시의 순간들이 모두 담겨있었습니다. 입학을 하는 순간부터 시험기간의 심정, 화이트코트 세리머니를 치르고 들었던 마음, 원내생이 되어 환자를 봤던 그 때의 마음과 이제는 원내생을 마무리하면서의 마음까지, 마치 일기처럼 제 치의학전문대학원에서의 생활이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학생으로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민 해 본 결과,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학생의 생활을 대표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수, 진심, 의지, 휴머니즘. 이 네 가지 입니다.

 

먼저 실수입니다. 병원생활에 입문하며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동기들의 생활은 실수 투성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화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크라운이 너무 안 맞아 혼잣말로 “왜 안맞지, 왜 안맞지”라는 혼잣말을 하시는 걸 듣던 한 원내생이, 안마를 하라는 줄 알고 느닷없이 안마를 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보철과의 한 교수님께서 케탁몰라를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그걸 들은 학생이 저희 소아치과에 계시는 “장기택 교수님”을 부르라는 말로 알아들어, (“기택 불러”라고 들었다 합니다) 소아치과로 뛰어가버렸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렇듯 저희 학생의 병원 일상은 말그대로 우당탕탕 천방지축,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겐 병원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한 진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인 “진심” 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거의 처음에 가까운 학생은 환자가 그저 어려웠습니다. 환자를 대할 때 감정이 앞서고, 응당 환자에게는 친절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원내생진료센터에 오시는 우리의 환자를 진료할 때, 진료를 하기에 앞서 수백 번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봅니다. 1~2학년 때 교과서 읽는 모습은 본 적도 없는 동기가, 자신의 크라운 프렙을 앞두고 교과서를 복사해와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처음이라서 너무 어려웠지만, 그만큼 진심을 다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제가 크라운 프렙을 하고 왔다 하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너 인생에서 한 프렙 중에 제일 잘한 프렙일걸?” 웃으면서 하신 말씀이지만 그 말씀 속에 진심의 힘이 얼마나 큰지, 선생님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4년동안 이 모든 과정을 정신없이나마 완수할 수 있었던 건 동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키워드인 “의지” 입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백번을 말해도 모자란 말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동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코로나 학번임에도 불구하고 동기애가 이정도라면, 지금 여기 계신 교수님들과 선생님들의 세대에서는 얼마나 그 힘이 더 컸을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수로 선생님께 한소리 들은 후엔 동기들과 맥주 한 캔 마시며 대화하고 나면 소심해진 마음을 툭툭 털 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이 일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동기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치의학대학원을 다니면서 결국 그 끝에는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의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강의실에서 수업만 듣던 1~2학년 때의 저는 공부가 제일 중요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훌륭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이 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진료를 지켜본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 결국 우리는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이 알고 치료를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은 기본일 뿐이라는 것을요. 교정과에서 제가 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환자가 진료에 불만이 있었는지, 굉장히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예진하는 레지던트 선생님께도 불같이 화를 내셨고 교수님이 오셨을 때도 진료비를 환불해달라며 소리를 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교수님은 환자를 타이르며 방으로 모셔갔습니다. 5분정도 흘렀을까요? 밖에서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의 긴장이 무색해질 만큼 환자분은 웃으시며 교수님만 믿는다고, 잘 진료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레지던트 선생님이 제게 “저런 걸 배워야하는건데” 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환자는 결국 사람이고, 우리는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을 배워야했던 것이었습니다.

 

치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학교에서의 4년이 치과의사로서의 완전한 정체성으로 형성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회로 나가 환자를 보면서 그 정체성은 수없이 변화하면서 서서히 굳어가겠지요. 그러나 저는 치의학대학원에서의 4년동안 제일 깨끗한, 수정 전 첫 번째 버전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첫 버전의 정체성이 앞으로 확립되어 갈 제 정체성의 방향을 정해줄거라 믿습니다. 

 

*** 
이게 뭐라고 그렇게 떨었는지, 연습을 하고 또 했지만 만족할 수는 없었던 발표였다. 그래도 학생으로서 내가 느꼈던 진심이 잘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마무리되어가는 치과대학에서의 생활을 더 알차고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다짐도 다시 해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