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한달 쯤 되었을까,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는 매년 “건강주간”이라는 타이틀로 여러 부스를 운영하는 미니 축제를 열어오고 있다. 그 역사가 얼마나 긴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관악 캠퍼스로 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있었으니 최소 8년은 된, 나름의 역사를 가진 행사이다. 건강주간 부스가 열리는 때면 가끔 동기들과 그 앞을 지나가다가 몇 번 재미로 참여해보곤 했는데 이게 웬걸, 이번에는 내가 그 행사의 일원으로서 부스를 지키게 되다니, 사람일 참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동기들과 다같이 차에 타고 관악을 가는 길부터 벌써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각자의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다가 혜화에서 만나게 됐는데 다시 그 각자의 공통 분모인 관악으로 간다는 게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말이다. 건강주간 행사에는 우리 치의학과 뿐만 아니라 약학과, 체육교육과, 의과 등 건강과 관련된 다양한 과들이 모여서 각종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 부스는 체어를 2대 놓은 뒤 간단한 검진을 진행하였고, 감사하게도 메가젠의 협조를 받아 덴탈아바타 만들기 등의 재미있는 컨텐츠들도 진행할 수 있었다. 내가 참여한 금요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28살이나 먹은 내가 학생이라고 했을 때 하는 말은 모두 같다. “이야 좋을때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 교수님들 모두 나를 보고 좋을 때라고 한다. 긴 학생의 길을 다시 걷게 되었을 때도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 참 편하겠다. 그런데 요즘 입에 달고만 사는 말이 있다면, “죽겠다”, “졸업 언제하냐”, “못 살겠다” 이 정도로 추릴 수 있겠다. 분명히 난 좋을 때인데, 좋은 게 맞을까? 이 공간을 대나무 숲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투덜대 보자면 하나도 좋지 않다. 지금 나는 힘들다! 아무래도 요즘이 시험기간이라 그 기분이 더 극대화됐겠지만, 그래도 원내생 생활이 쉽지는 않다. 아침 일찍과 늦은 오후에 들어야하는 강의들과 그 사이를 가득 채운 프랙틱스 스케줄, 그리고 그 점수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마음이 무겁다. 몸이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사소하게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들도 많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도 힘들고 그걸 더 크다고 느끼는 내 자신에게도 실망스럽다. 물론 알고 있다. 그 “좋을 때”가 무엇인지. 아직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온전히 스스로 사회
본격적으로 원내생으로 업그레이드 된 지 2개월 정도가 지나가는 시점이다. 원내생인 우리는 단순히 어시스트를 하는 역할을 넘어서 ‘student dentist’로서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아직 치과의사 면허도 없는 원내생일 뿐이지만, 진료의의 자리에 앉아 치료를 하고 있는 모습에 괜시리 책임감을 느낀다. 다가오는 9월 1일에는 발치가 예약되어 있다. 발치 어시스트가 아닌, 진료의로서 내가 사랑니 발치를 하는 것 말이다. 이제 진짜 임상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임상을 마주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마음이 힘든 것 같다. 교과서로 배우고 1, 2학년 실습 때 했던 것들은 쉽게 해냈던 것 같은데 그걸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실습 모델은 “얼추” 모양새만 갖춰도 됐겠지만, 임상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부담도 두 배가 된다. 내 첫 임상 경험은 원내생진료센터의 한 환자분이었다. 내 지인이 아닌, 초면의 환자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려나, “진짜 환자”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전날 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자기 전 환자분을 맞이하고 진료가 끝나서 귀가시켜드리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시뮬레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에 귀여운 시츄 한 마리가 들어왔다. 강아지 이름은 촌스러워야 오래 산다는 엄마 아빠의 주장으로 이름은 최고참으로 지어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느낄 새도 없이 물 흐르듯이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우리 고참이 나이가 14살이 되었다. 평소엔 산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고, ‘간식 먹을까’라는 말에 헥헥거리는 모습에 14살이라는 나이는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달쯤 전인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길래 데려간 동물병원에서 신장 수치가 너무 나쁘다는 얘기를 듣고, 입원까지 시켜야 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강아지가 아픈 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힘들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강아지 한 마리가 불러오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온 가족이 고참이 상태만을 바라보고 지냈다. 나는 고참이와 보내는 시간이라도 늘려보려고 혜화와 분당에서 통학을 했다. 매일 새벽 6시에 나서 광역버스를 타는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서야 함께하는 시간이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강아지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냐며
경기도의 영통이라는 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분당으로 이사와 학창시절을 보낸 내가, 3년 전부터 서울역에 살고 있다. 서울 중에서도 “진짜 서울”같은 서울역에 살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지라 아직도 내가 서울특별시 중구에 산다는 게 낯설기만 하다. 서울살이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학부 시절 관악에서 3년 정도 산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하게 “관악은 서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했다. 한강을 건널 때는 “진짜 서울”을 간다면서 들뜬 마음으로 한강 사진을 찍었던 것도 생각난다. 그런 내가 사람이 살 곳이 있는지도 몰랐던 ‘서울역’에 살게 되다니, 그제서야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살이 3년차, 나는 서울과 사랑에 빠졌다. 서울역에 사는 것은 예상보다 재미있다. 삐까뻔쩍한 건물들과 수없는 캐리어들이 익숙해진다. 매일 반찬거리를 사러 들르는 마트에는 외국인들이 더 많고, 종업원들도 영어로 먼저 말을 걸어온다. 내가 서울역을 좋아하는 첫번째 이유다. 말 그대로 “재미”있다.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수없는 변화와 다양성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나에게도 전달된다. 두번
올해 2월, 어느덧 치의학대학원에 입학한 지 2년이 지나고 본과 3학년이 되었다. 본과 3학년이 된 후 처음으로 맞게 되는 공식 행사는 바로, 그 유명한 화이트 코트 세레모니! 예비 의료인으로서 첫 발걸음인 그 화이트 코트 세레모니를 하게 된다니, 떨리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의료인인 오빠를 보면서 난 정말 의료인은 못 되겠다고 혀를 내두른 게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였던 내가 의료인으로서 첫 발짝을 떼게 되다니, 사람 일은 정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놀랍게도 의학도들은 원래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무겁고 진지한 직업이기에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었고, 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엔 의사의 방문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세균학이 발달해가면서 위생 개념이 강조되면서 청결하게 보이며, 전문성과 냉철함을 느끼게 하는 흰 가운으로 변했다고 한다. ‘화코세’라고 불릴 정도로 이제는 유명해져버린 화이트코트 세레모니는 1993년 콜롬비아 대학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당시 소아과 의사였던 아놀드 골드 박사의 아놀드 P 골드재단에서, 의학 훈련을 시작하는 의학도들에게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한 세레모니였다. “올바른 인격과
지금 28세인 나는, 20살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 않고 과외를 했다. 용돈벌이로 시작하긴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언니누나 사이로 지내는게 재미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벌써 30에 가까워지다 보니 이제는 언니누나로 지내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크게 나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항상 1:1 과외로 수업을 했는데 약 반년 전 친구의 권유로 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장소는 무려 대치동! 학생 시절에도 다녀본 적 없는 대치동 학원가에 선생님으로 다니게 되다니.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상태로 어찌저찌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대치동의 이미지는 내 생각과는 같기도, 다르기도 했다. 일단 대치동 그곳은 내 생각보다 더 강렬했다. 내가 맡은 반은 ‘중등 의대 준비반’이었으니… 내가 다니게 된 학원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긴 했지만, 처음 마주하게 됐을 때 적잖이 놀란 건 사실이다. 대치동은 진짜 이렇구나 라는 생각으로, 내 색안경은 더 진해졌다. 첫 수업 날 학생들을 만났는데, 내 색안경이 옅어졌다. 학부모의 등쌀에 쓸려 좀비처럼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을 상상했는데 이게 웬걸, 학생들의 의욕이
요즘 세상에서 SNS는 소식의 창구이다. 연락을 하지는 않는 지난 인연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민망하지 않은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나에게 있어 SNS는 학창시절 때부터 빠짐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초등학교때는 버디버디, 중학교때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고등학교 때는 페이스북, 그리고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는 인스타그램까지 언제나 함께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나이기에 SNS를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방과 후에 집에 와서는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그 관계를 이어 나갔다. 재미있는 사진이 있으면 업로드하고 서로 웃었으며, 심지어는 몇몇 친구들과 공용 다이어리를 쓰기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 내가 나이가 든 걸까, 최근에 급격히 SNS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광고와 과다한 정보들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특히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강조되는 SNS 특성상, 주변인들이 어떤 ‘감정’으로 지내는지를 공유하고 공감하기보단 ‘어떤 멋진 일’을 하는지만 자극적으로만 다가온다. 게시글을 업로드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공유하기보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기 바쁘다. 재미있는 얘기를 친구와 나눈 적이 있다.
얼마 전 한 교수님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교수님께서 동기부여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셨다. 학업에 있어 동기부여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이다. 여느 교수님들께서 그러시듯, 학생들의 동기부여 부재에 대해 걱정이 깊어 보이셨다. 나 또한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남의 일처럼 맞장구 쳤지만 속으로는 웃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서 걱정하는 학생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아 당당할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학업이 재미가 없을 때가 있다. 공부가 재미있는 학생이 어디있냐며 위로해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웃으며 넘길 수 없을 정도의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기초과목을 배울 땐 나와는 무관한 공부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임상과목을 배울 땐 아직 먼 일 같아서 애착이 가지 않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학업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대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학우를 만나기 힘들다. 그리고 주변에서 동기를 찾지 못해 길을 잃은 느낌이 든다는 고민을 들어본 적도 많았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본다면, 미래의 직업적 안정성 때문에 수동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살면서 매 순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제일 가깝게는 가족, 친구들, 연인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선생님, 교수님과의 관계, 단골 식당에서는 사장님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치과의사가 된 후에는 환자, 치과위생사와도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관계라는 건 참 어렵다. 평소에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기에 특별한 자극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뜨고 밤에 눈 감을 때까지, 혹은 그 넘어서까지도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가화만사성이라는 고사성어도 다섯글자에 그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유치원때부터 교우관계가 좋다고 소문난 아이 중 하나였던 나에게도 관계는 민감한 주제였다. 관계는 다양하게 이뤄진다. 갑과 을의 관계, 동등한 관계, 사랑하는 관계 등... 간단하게는 긍정적인 힘을 주는 관계와 나를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관계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관계에 대해서 극단적인 표현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관계라는 것은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내 몫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관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다양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7월 1일, 뜨거웠던 여름날의 날씨처럼 치열했던 11과목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방학이 찾아왔다. 방학은 학생에게 있어 최고의 특권이다. 27살이나 먹은 내가 방학이라고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철없어 보이긴 하지만 신나는 이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도 내 방학만큼은 부러움에 몸서리친다. 내가 생각해도 약 2개월 동안의 온전한 자유시간은 부러워 할 만 하다. 친구들마다 이 소중한 방학을 즐기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연구에 뜻이 있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연구활동에 매진한다. 동아리 활동이 방학에 집중되어 있는 친구들은 합숙훈련에 참여하며 동아리 활동에 최선을 다한다. 어떤 친구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조용히 보내기도 한다. 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여행을 선택했다. 아마도 3학년 원내생을 시작하면 이렇다 할 여름방학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없이 좁아진 내 시야에 큰 세상을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고작 시험 한 과목, 한 문제에 좁아져 있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야 했다. 여행은 치의학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떠났다. 시험기간에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기들과 방학을 하자마자 여행이라니,
한 2주 전 토요일, 여느 토요일과 다름없이 봉사활동을 하러 종로로 향했다. 특별할 것 없는 토요일이었고 봉사활동이었다.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귀여운 문구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화이트보드에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 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 추측이건데, 종종 치과위생사 선생님을 따라오는 8살배기 아드님이 써 놓은 듯 했다.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 써진 모양새는 너무 귀여운 아이 글씨체였지만, 날카로운 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어린 아이에서 본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회색빛이었으면 미소를 지어 달라는 말을 했을까?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글씨체가 괜히 그 문장에 힘을 더했다. 공격을 받고 되돌이켜보니 미소를 잃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웃음이 많은 현장이기는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치과에서 미소를 잃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소를 조금 지어주세요’라는 그 한마디는 요즘의 일상 전체를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피곤하다’, ‘짜증난다’ 라는 말을 쉴 새 없이 했던 것 같다. 핑계라고 둘러대보면, 학교가 대면으로 거의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