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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Editor Column

참으로 조심스럽다. 문학이면서 정치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를 읽은 지 오래고 노벨상 수상에 큰 역할을 한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읽지도 않았으니 한 줄 글을 보태는 것은 당치도 않지만 글과 말이 주업인 치의신보인 이유로 문학사적 경사스러운 업적에 글을 붙인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雪國’의 첫 구절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를 떠올리며 3명의 수상자를 가진 일본을 부러워했다. 영어, 프랑스어를 일본어로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이 마땅한 여가거리가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한 집씩은 책장 한 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중에 文의 나라인 한국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없다는 것은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국민이 염원하던 노벨상 작가를 갖게 되었으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작품과 그의 이념 편향성에 대한 논란이 많다. 비평가나 평론가, 언론인 등의 전문가 견해와 한강 작가의 기고문 등을 통해서 왜 그의 수상에 대해 환호하는 사람도, 마뜩찮아 하는 사람도 많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 한림원의 수상 이유를 보면 “역사적 상처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을 창조하고 “삶과 죽음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그려냈다고 한다.

 

우선 호평하는 근거로 ‘소년이 온다’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씻김굿의 형식으로 담아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학살이 남긴 피어린 기억을 파묻으려는 반역사적 시도에 저항해 상처는 기념하고 껴안을 때 비로소 치유되는 것임을 환기한다고 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인간사회에서 갈등, 폭력,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국가체제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인간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며 폭력의 정도에 따라 자유체제와 독재체제로 나뉘며 현재 남·북한의 정치체제가 어떠한지를 보면 된다.


5·18과 4·3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일방적 폭력성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한강 작가의 역사관이 근현대사 통찰이 부족했고 편향적이며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처럼 편향된 역사관을 심어줄 개연성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K-culture가 힘을 발휘하여 데보라 스미쓰처럼 뛰어난 번역가가 한강의 작품을 번역할 수 있었던 토대는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의 힘이 밑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폭력에 희생된 사람은 억울하다. 한국 사람의 억울한 마음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자신이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나쁜 처지에 빠져 화가 나거나 상심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남을 원망하여 恨으로 남고 恨은 스스로 극복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풀어줘야 되고 보상되어야 하며 세월이 가면 미화된다.


어떠한 연유가 되었건 희생자는 미화되고 정부나 기득권층을 비난 혹은 악마화 하고 북한과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한 이유는 2000년 이후 더 심화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국가적으로 축하할 일이며 비평, 비판이 활발해질수록 좋은 일이다.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이 낯설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출판문화의 르네상스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