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3번째
‘아이아스’는 이렇게 말했다(하)
-전생 이야기
<지난호에 이어 계속>
그대의 죄를 징치하는 날. 전에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대의 스승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건 너의 죄를 묻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요즘 가장 명망 높은 무사이자 시인이자 닌자인 그대를 모시고 한 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자리니라. 여기 당대 최고의 닌자와 유학자들이 와 계신다. 오늘 그대의 검, 닌술, 시를 평가할 것이다. 단 한가지라도 수습의 단계가 넘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물론 다시 도장을 열어도 좋고 이름을 바꾸고 떠돌면서 혹세무민을 하는 것도 그대의 자유다. 단 세가지 모두 수습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문파의 뜻에 따라야 한다.
먼저 그대 앞에 벼루와 붓이 놓여졌다. 어떤 것이든 자신 있는 시 한수만 쓰면 되는 상황. 이전의 그대라면 일필휘지로 젊은이의 기개를, 사랑의 서러움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써 나갔을 테고 수습 이상의 평가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대의 눈은 세파에 찌들어 탁해져 있었고 그대의 가슴은 굳어있었다. 무거운 팔로 간신히 운율만 맞춘 그대의 시를 읽어 내려가자 글자를 아는 모든 이들은 박장대소 했다. 저명한 학자의 평가조차도 필요 없을 정도로 누가 읽어도 알아챌만한 조잡한 위작(僞作).
다음으로 그대의 앞에 닌자의 활동복이 놓여졌다. 어차피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그대의 닌술이 하나 둘 펼쳐지자 이번에도 역시 자리에 있던 전부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통 닌자의 평가가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래 전의 술법이라 이제는 비술에도 끼지 못하고 민간에 까지 알려진 방법이거나 그것을 약간 변형한 조잡한 움직임은 닌술이라기 보다는 어설픈 마술에 더 가까웠다.
마지막 검의 순서. 그대로서는 가장 자신 있는 순서였다. 이미 정식 무사로 인정을 받은 터가 아닌가. 대련 상대는 아직 수습인 그대의 동문 후배. 객관적인 실력으로 봐도 그대의 우세는 확실해 보였다. 아까의 장난 섞인 분위기는 완전히 가시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도장에는 두 검사의 기합소리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리었다. 자신이 가진 실력의 절반만 가지고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어쩔 수 없이 산적이 돼버린 가련한 이웃들이나 괴롭히던 그대의 검에는 장작을 패는 나무꾼의 완력은 실려 있을지언정 검사의 기백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결국 손목의 상처와 함께 검을 놓쳐버린 그대는 무사의 가장 큰 수치인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조용하던 좌중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세번의 패배 후 할복을 각오한 그대는 검을 들고 무릎을 꿇었지만 스승의 명령을 받은 동문들은 그대의 자결을 제지 했다.
사랑하는 제자여, 왜 그리 성급하게 목숨을 버리려고 하느냐.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대를 벌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그대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를 주기 위함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대는 검도, 닌술도, 시도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준에는 미치지 못 했구나.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너에게는 멋진 능력이 있었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세번이나 웃게 만든 그 재능을 두고 세상을 등지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지.
이 시간 이후로 넌 광대가 되어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무대에 있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검과 붓을 잡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다.
그래도 한때 동문수학 했던 무사에게 광대라니! 너무 심한 판결이라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그대를 위로해 주긴 했지만 패자에게 승자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 검과 붓을 놓고 분루를 흘리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동안 입담 좋고 재주 좋은 광대로 그대는 유명해 지게 된다. 처음 얼마간 동문에 대한 연민으로 그대를 대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대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완전한 광대가 되었다.
그대 가련한 이에게 훗날 누군가 광대로 살아가는 치욕 속에서도 자결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을 때 그대는 ‘마지막 대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검이야 말로 내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그것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더욱 그 애정이 늘어났소. 비록 광대로서지만 무대에 선 그 순간만큼은 검을 쥘 수 있었기에 난 광대를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승의 명령 이전에 시인 앞에서는 무사인척하고 무사 앞에서는 시인인척 하다가 여의치 않을 때는 닌술로 상대를 현혹 시키던 그 시절부터 이미 그대는 광대였음을, 자신의 단련없이 타인의 약점을 비판하고 입으로만 떠들지만 그러면서도 저명한 이들의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광대야 말로 그대의 천직이었음을.
가련한 자여. 이것이 그대의 전생이다. 아이아스는 조금의 더함도 뺌도 없이 그대의 전생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였다.
아이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등단을 한 후 전생의 저는 광대로 살았지만 현생의 저는 치과의사, 작가 모두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담아서 쓴 글입니다. 아이아스는 제 인터넷 필명으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이름을 따온 제 아바타로 저 자신의 자신 있는 모습만 모았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다이몬입니다.
이승훈
이수백치과의원 원장
치과의사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