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s to Juliet
지난 토요일 필자는 영화관을 찾았다. 오전 진료 시간에 업무에 서투른 직원 한 명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혼을 내주고 나니 마음이 약한 필자의 기분도 영 편치가 않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털어낼까 생각하다가 토요일 오후 영화관을 예약도 없이 가게 된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시간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영화관을 찾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역시나 필자가 보고 싶을 만한 액션·스릴러 장르의 영화는 매진되었거나 늦은 시간 대에나 좌석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 대에 선택할 수 있는 영화는 하나밖에 없는데. 이럴 때 표가 남아있다면 보나마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인기가 없는 영화일터. 제목은 “Letters to Juliet”.
영화 포스터를 보고 내용을 예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기는 하지만 첫눈에도 액션을 좋아하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한 romantic comedy 영화일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도 그렇고 한참을 어두침침한 매표소 앞에서 망설이다 표를 끊고야 말았다.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 젊은 연인들로 이루어진 커플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혼자 온 것 같은 일부의 사람들은 여성관객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역시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런 영화를 한번 보는 것도 여성을 이해하는 과정일 거야’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필자는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작가를 꿈꾸는 여주인공 소피와 요리사인 약혼남, 그들은 이태리의 도시 베로나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그 도시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란다. 여행을 와서도 곧 개업할 식당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남자 친구 빅터는 비즈니스에 정신이 없고, 사뭇 감성적인 소피는 줄리엣이 살았다는 집에 찾아가서 그곳의 분위기와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대부분이 여자들) 속에 감상에 젖어들고. 사람들은 이곳 줄리엣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 줄리엣 집의 발코니가 있는 담 벼락에 사연이 담긴 편지를 붙이기도 한다. 우연히 소피는 50년 전 한 소녀가 보낸 편지를 발견하고 답장을 보내게 되는데….
동화 속 풍경같은 이태리 베로나 주변의 풍경이 중간 중간 나오는 것은 좋았고, 대사 중에 그럴듯한 말이 있기는 했다. “If what you felt then was true love, then, It"s never too late. If it was true then, why wouldn"t it be true now? You need only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소피의 답장에 나오는 문구이었지만. “How many Sophies do you think there are in this planet? Don"t wait 50 years like I did. Go! Go! Go!”
하지만 사실 필자는 영화관에 앉아있는 내내 “왜 세익스피어는 이태리 베로나를 무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을까? 정말 베로나가 맞기는 한 건가?” 심지어는 “로미오가 여자였나 줄리엣이 여자였나”라는 고민을 문학적인 관객들 속에서 창피하게도 하고 있었다. 지루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이제야 뭔가 화끈한 액션이나 정말 로맨틱한 장면이 찐(?)하게 나오지는 않을지를 기대하면서 기다렸지만, 영화는 필자의 기대를 연거푸 저버리며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필자를 즐겁게 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다소 유치하고 뻔한 스토리가 계속 되는데 중간 중간 탄성소리가 관객들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로 여자 관객들의 입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 배우가 소피와 함께 옛 남자 친구를 50년이 지나서 찾아나섰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은 더 압권이었는데. 옛 남자 친구가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 옆의 여성 관객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몸이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쏠리며 스크린을 깊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곧 감동의 눈물이라도 나올 것 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여성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영화감상의 포인트가 되어버렸는데. 그분들은 아마 ‘웬 중년의 청년이 생뚱맞게 이런 영화관에 와서 매너도 없이 힐끗힐끗 처다보나’라고 했을 테다. 역시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이런 영화를 남자가 혼자 볼 때는(혹시라도 용기가 생기면) 가능한 한 맨 뒷자리나 옆 모서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여성관객들을 구경하는 것이 부담이 없고 편하니까. 재수없이 젊은 커플들 속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서 옆자리의 여성을 처다보며 즐기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더 스릴이 있기는 하겠다.
필자는 그 이후 여성이 “최근에 감동적으로 본 영화가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가슴에 손을 모으며 이렇게 대답해 준다. “Letters to Juliet요.” 본전은 뽑아야 하니까.
박상섭
서울 리빙스톤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