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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4번째) 마지막 남은 고귀한 아날로그

마지막 남은 고귀한 아날로그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의 강의실. 한 교수님께서 도화지만한 누런 갱지의 강의록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의에 열중하고 계신다. 잇따라 들리는 소리, “다음 슬라이드, 철커덕…, 다음 슬라이드, 철커덕…” 강의 도중에 슬라이드가 프로젝터에 끼었나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조교가 트레이 속을 긴 자로 쑤셔대고 있다. 늦은 밤, 같은 대학 부속병원의 텅 빈 치과진료실. 그 교수님께서 치과유닛의 브래킷을 책상 삼아 치과조명 등을 밝혀놓고 논문을 열심히 쓰고 계신다. 집게로 물린 이면지에다 지우개가 달린 나무연필로 말이다.  


이 상황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2010년 현재이다. 필자가 유 교수님과 지금의 대학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것은 8년 전이다. 처음 한동안 나는 이 분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송구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속 터지는 심정이었다. 이 분이 정년퇴임을 목전에 둔 백발성성한 원로 교수가 아니셨기에 더욱 그랬다. 이 분에게는 컴퓨터라는 게 아예 없었다(물론 지금도 없지만). 따라서 파워포인트 파일로 작성한 강의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위의 간곡한 권유와 성화를 뿌리치고 핸드폰마저도 거부하셨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듯, 저런 불편과 비효율을 감수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에게 컴퓨터가 없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현대의 디지털 문화를 거스르는 이 분은 가히 불가사의한 존재이었다. 작년 병환 중에 겨우 핸드폰 정도는 장만하셨다지만 이 분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분은 치과진료실에 디지털영상장치를 설치할 때에도 이를 마뜩해 하지 않으셨다. 왜 그동안 잘 사용하던 멀쩡한 방사선장비를 모두 버리고 그 큰돈을 들이냐고 끝내 고집을 부리셨다. 해서 우리 병원에는 아직도 이 분만이 홀로 사용하시는 예전 필름과 현상암상자가 진료실 한편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괜스레 애가 타는 것은 이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 뿐, 정작 당사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당당하시다.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나는 구닥다리 유 교수님을 그 누구보다 존경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분에게 느꼈던 답답한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고, 디지털의 시류와 그 위력을 부정하게 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 교수님의 아날로그적 발상법 속에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그 분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근면하고, 겸손하며, 소박하시다. 이 분은 평일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야간진료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휴진하는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도 병원에 나와 홀로 환자를 돌보신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까지 진료하시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또한 장애인이나 재소자 진료처럼 남들이 힘들어 하는 일은 모두 이 분의 몫이다. 아래 직원에게 복사 한 장을 시키는 일 없이 몸소 하시며, 커피 값 50원을 아끼자고 구내의 싼 자판기를 찾아 먼 걸음을 하시는 분이다. 비싼 음식 한번 사주신 적은 없지만, 이래저래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다. 무엇 하나 자신을 돋보이게 치장하는 일이 없고, 늘 뒷전에만 묵묵히 물러나 계시는 분이다. 나는 유 교수님에게서 올곧고 의연한 옛 선비의 모습을, 빠르고 간편한 것만 추종하는 시류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은 로키산맥의 고지대에서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한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유 교수님이 바로 이런 명품의 나무가 아닐는지….


힘든 암 투병 중에도 지친 몸으로 강의실에 서시는 유 교수님, 부디 이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따뜻한 체온을 전해주는 마지막 아날로그로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정원균
연세 원주의대 치위생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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