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5번째
금산사의 ‘도란도란’ 템플스테이 <상>
새벽 3시.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다. 집에서라면…
하지만 이곳 금산사(寺)의 오전 3시, 하루의 시작이다.
아련히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이어 같은 방에 머무르는 도반들의 휴대폰 알람소리도 여기저기서 막 터져 나온다. 오늘은 4박 5일 일정의 전북 김제 금산사의 ‘도(徒)란도(道)란 구들방에서 쉬어가는 템플스테이"의 마지막 날. 장작을 때어 뜨겁게 달군 절집 구들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세속을 버리고 놀다 가라는 뜻으로 마련한 행사이다.
일어나야하나 말아야하나. 아무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닷새 전 들어오던 날부터 몸이 으스스 하더니 내내 몸살을 앓아 새벽 예불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새벽 행사에는 참석을 못한 터라 더 갈등이 인다. 마음 한구석의 비겁함이 몸 어디엔가 머무르고 있던 게으름과 또 다시 손잡으려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결국은 망설임을 이긴다. 어둠 속에서 옷을 잔뜩 껴입고 방문을 나선다. 내가 맨 마지막이다. 흰 눈이 온 경내를 덮어서 책이라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밖은 환하다.
법당 안엔 스님 몇 분과 우리 일행뿐이다. 옆 사람 하는 대로 부처상에 대고 연신 절을 해 본다. 부처를 형상으로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껏 몸을 낮춰 본다. 격식을 통해 나 자신의 공경심을 끌어낸다. 일념으로 성심성의를 다 한다면 나 스스로를 모시고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약이색견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不能見如來 예불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새벽 찬 공기가 허파꽈리를 조금은 긁어 댔으나 잊을 만하다.
아침 공양(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에 못잔 잠을 채우려고 누워 있는데 누군가 세배를 가자고 한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세배를 가? 누군지 몰라도 새해 인사를 하려면 좀 이리로 오시라고 해! 라는 말이 튀어 나올 뻔 한다.
그래, 올해는 성질 좀 죽이고 낮춰 보자 한껏.
남 하는 대로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자.
먼저 큰 스님이라고 하는 분을 뵌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다. 절집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분이기도하다. 방이 아주 크고 방바닥은 뜨겁다. 말씀은 의외로 평범하다. 하지만 도(道)란 일상(日常)속에 있고 진리는 절대적으로 평범함 속에 있다지 않던가.
‘새해에는 말과 생각과 행위로 복을 짓자"고 하신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지… 그것들로 인해 주위에 상처만 주어온 나는 이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겨 둔다.
다음은 주지(住持)스님. 식사시간에 한두 번 뵌 분이다. 집의 위치가 가장 좋다. 방도 크고 방바닥도 뜨거우나 큰 스님 방만큼은 아니다. 큰 절을 운영하느라 바쁘신가 보다. 그저 서둘러 세뱃돈 주니 그냥 받는다.
내가 세뱃돈? 기분이 이상하다. 그동안 주기만 했지 받은 적이 없지 않던가?
이어서 홈스테이, 아니지 템플스테이 담당 스님 차례다. 우리 숙소 바로 위에 따로 자리 잡은 조그마한 기와집이다. 방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방바닥은 따습다. 스님 쪽 벽면 열어 제낀 큰 창문으로 함박 자연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산 속 무채색 설경을 뒤로하고 스님이 앉아 차를 끓여 낸다.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역광으로 작용하여 스님의 광나는 머리를 더욱 반짝이게 하고 거친 종이 벽지와 흑갈색 창틀은 창 밖 그림에 기막히게 어울리는 액자가 된다.
보기 드문 정경이다. 스님 머리위로 삼백호는 됨직한 아름다운 한국화가 펼쳐진 셈이다.
멋을 아는 분이다.
“스님! 큰 스님과 주지 스님 것 보다 더 큰 후광(後光)이 보입니다" 내가 슬쩍 농(弄)을 쳐 본다.
“사실은 그게 없으니 억지로라도 만드는 겁니다" 멋쩍어 하는 스님이 더 재미있다.
다기(茶器)를 사이에 두고 막힘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