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야구, 추억 그리고 꿈
1982년,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그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나쁜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는 내 체질(?)에 비춰보아 아마 좋은 추억이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뭐든지 처음은 쉽게 잊혀지지 않듯이 ‘첫경험’이라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야구는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포츠이지만, 나의 어린(초등학교) 시절에도 지금 못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는 스포츠였다. 물론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므로 그때에는 그 몫을 고교야구가 대신하고 있었다. 당시 고교야구 결승전이나 주요경기는 지상파 방송에서 생중계로 방송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그 방송은 결승에 진출했던 고등학교의 해당 지역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을 받을 정도였다. 지금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보다도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니 가히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2년은 지금 우리나라 최고 인기 스포츠, 바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이다. 또한 그해 1월에는 소위 교복자율화 조치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두발제한과 교복착용이 학생들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는데 당시 시대상황으로 비추어 봤을 때 꽤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 발표로 인해 그 이듬해부터 교복착용은 금지되었고, 나는 딱 그해만 교복을 입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프로야구 출범 역시 교복자율화 만큼이나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고교야구 이후 대학야구나 실업야구가 있긴 했지만 모두 서울에만 있다 보니, 지역연고가 없어져 인기가 시들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들이 거의 매일 경기를 치르는 방식의 프로야구는, 당시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4번 밖에 없어 항상 야구에 목말라 하는 팬들과 국민들의 많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프로야구는 이런 국민적 관심위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광주의 한 중학교를 다니던 그해 내가 살던 곳에서도 개막전이 열렸다. 지금은 해체된 원년 프로야구 팀 MBC 청룡과의 경기로 기억되는데,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공설운동장(지금의 무등경기장)을 찾았다. 지금에야 야구경기 보러가는 것 가지고 뭐라 할 선생님이 없겠으나 당시에는 학생들이 그런데 다니면 야단을 맞던 시절이라 학교 선생님들께 걸리지 않기 위해 까만 교복을 벗어던지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갔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얼마나 순진무구했던지 경기장을 가면 그냥 공짜로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도착해보니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았고, 공짜인 줄 알았던 경기가 입장료를 내야했던 것이다. 당시 입장료 가격이 500원정도로 기억되는데, 같이 간 친구들의 돈을 다 합쳐도 입장권을 살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해서든 볼려는 마음에 나와 친구들은 당시 운동장 벽에 나있는 조그만 개구멍 같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자고 했다. 한두명씩 잘 빠져 들어가다 그만 내가 들어가려는 순간 딱 걸리고 말았다. 먼저 들어간 친구들과 못 들어간 친구들은 다 뿔뿔히 흩어져 도망치고 구멍사이에 낀 나는 경기진행요원 아저씨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지만 한참 동안의 취조(?)와 기합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기합도 받고 울음도 그쳐 안정되자 갑자기 그 아저씨가 따라오라 하면서 포수 뒤쪽 진행요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여기서 잠자코 보고 있어라. 딴 짓하지 말고’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해서 내 생애 첫 경기장 야구 관람은 비록 서서 보긴 했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헤어진 친구들 걱정에 불안했던 마음이 야구에 빠져들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경기장에 울려 퍼진 응원의 함성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의 이런 응원 때문이었을까?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내가 응원하던 홈팀 해태 타이거즈가 MBC 청룡을 1점차로 이겼던 것 같다.
이후 야구 관람은 중학교 시절 나의 재미있고 행복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 야구부가 있어 야구시설이 갖춰진데다가 공설운동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타 지역 프로야구팀이 원정경기가 있을 때면 가끔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하였다. 방과 후 해저물 때까지 스탠드에 앉아서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사인 한 장 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쉴 틈 없이 짜여진 학교생활 때문에 더 이상 경기장에서 야구를 직접 볼 수 없게 되면서 점차 야구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82년도에 있었던 교복자율화 조치나 프로야구 출범 등은 당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의 부당성을 은폐시키고,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대학에 들어온 후 어릴 적 내게 행복한 꿈을 안겨주었던 야구는 더 이상 옛날의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시절은 흘러 교복자율화는 제자리로 돌아와 중고등학생들의 교복 입은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고, 프로야구는 사람들이 여전히 가장 좋아하고 즐기는 국민스포츠로 더욱 굳건히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보의 생활을 마치고, 또 개업을 하고, 그리고 개업한지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서 프로야구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야구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아들 녀석의 손에 이끌려 거의 수십년만에 다시 찾은 야구장은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경기를 보는 관중이며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기술도 예전과 달리 훨씬 세련되어진 듯 하였다.
문득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전의 이곳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열린 프로야구 첫 경기에 내가 서 있었던 자리, 관중석을 가득 메운 소박한 모습의 관중들, 조금은 거칠고 촌스럽던 선수들의 모습, 무엇보다 그것을 보면서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13살의 나의 모습. 이런 아련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예전의 행복감에 다시 빠져 들었다.
마침 광주에서 치과의사 야구단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 없이 가입하게 되었고, 30년전 어린 소년이 꾸었던 행복한 꿈을 지금에 와서 다시 꾸고 있다.
다시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준 야구, 비록 몸은 안 따라주지만 참 좋다!!
김기현
광주 수치과의원 원장
덴탈스파이더스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