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2번째
봄은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유난히도 바쁜 올해는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어서 하루가 마치 한달 같고 한달이 마치 하루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계절이 바뀌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서류더미에 코를 박고 일만 하다 보니, 늘어나는 것이라고는 자판실력이요, 일회용 커피잔밖에 없더군요. 더군다나 강남 한복판이란 겉보기에는 젊고 활기찬 동네인 듯싶지만, 그 속 빌딩숲 직장인들에게 있어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보다는 1/4분기, 2/4분기, 3/4분기, 4/4분기라는 업무 마감일이 더 가까운지라 매일이 그저 그런 일상처럼 느껴지기가 일쑤입니다.
사실, 올해도 그렇게 무심한 시간 속에, 무심한 계절 속에서 한 해를 보낼 것만 같았습니다. 만약 코끝에 닿는 은은한 라일락향이 아니었다면, ‘봄"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그렇게 5월을 흘려 보냈겠죠.
어김없이 바쁘게 빌딩 사이를 지나 회사로 향하던 출근 길, 코끝에 살포시 라일략향이 내려 앉았습니다. 순간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휘휘 주변을 둘러봅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주차장을 지나 안쪽 깊숙이 담벼락 너머로 라일락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뿐 아니라 곳곳, 구석구석마다 수줍게 봄 꽃들이 피어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새삼 몰랐던 진실을 찾은 것만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니, 누가 알아채건 말건, “봄은…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나 빼놓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도 사실은 봄이 와있었던 거죠. 내 코끝에 봄이 와 닿아있었고, 손끝에도 와 닿아있었습니다.
결국, 일 더미에 봄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지만, 봄을 빼앗은 것은 결국 제 자신이었겠죠. 원한다면 언제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향기를 내뿜으며, 때로는 제 꽃잎을 흩날리며 봐달라 알아채달라 노력하고 있는 봄 꽃들이 한없이 고맙기만 한 순간입니다. 덕분에 숨 한번 들이쉬고, 한번 더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봄입니다. 모르고 있었겠지만, 외면하고 있었겠지만 봄입니다. 제게 봄이 찾아왔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봄이 찾아왔겠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봄을 만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봄입니다.
오늘은 옥상으로 한번 올라가 볼 예정입니다. 봄바람, 봄 향기, 그리고 곳곳에 피어있을 보석 같은 봄꽃들을 찾으러, 잃어버린 봄을 찾으러. 문밖으로 한발자국만 나가도 봄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어쩌면 알아채지 못한 사이 어깨위로 살며시 꽃잎이 내려와 봄을 알려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이주선
㈜휴네스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