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4월 20일로 복무만료
지난 4월 어느 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출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 2층 관사에서 씻고 덜 마른 머리를 털며 1층 진료실로 내려오니 2011년 4월 20일부로 공중보건의사 복무만료를 알리는 공문이 내 자리에 놓여있었다. 이미 책상 위의 달력에는 ‘전역일’이라고 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놓았었지만, 막상 인쇄된 공문을 받아 들고나니 이제야 모든 것이 끝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어느 날
2008년 4월 24일, 아직 조금은 군인 티가 남아있는 반 까까머리에 독하디 독한 훈련소표 감기를 달고 경북에 배치 받은 49명의 신규 치과공중보건의사들이 경북도청 강당에 모였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하는 복불복 제비뽑기로 3년간 근무하게 될 부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초등학교 앞에서 커다란 황금잉어를 경품으로 건 뽑기통 같은 곳에 1번부터 49번까지의 번호가 들어있었다. 다들 앞 번호가 뽑히길 바라면서 순서대로 뽑기를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8번을 뽑았다. 그러나 딱히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근무조건이 좋다는 곳은 벌써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친구들이 많은 대구에서 멀리 가기 싫었던 나는 경산을 택했다.
시골 마을 의사
학교 다닐 때 내가 알던 경산은 시가지 일부뿐이었다. 첫 부임지는 ‘자인’이라는 조그마한 면소재지였다. 대부분의 시골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새로 온 젊은 햇병아리 의사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그렇게 나의 시골 생활은 시작되었다. 실수투성이의 진료였지만, 모든 환자에게 성심 성의껏 진료해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endo 중에 file을 2개나 separation시켰던 윗동네 박 할머니는 고맙다며 복숭아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고, 몰래 음료수를 사다 놓고 가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한 달에 한 번은 사회복지시설에 출장을 가서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학생 때는 장애우 진료는 소아치과를 전공하신 선생님들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많은 선배님들이 이미 진료 봉사를 하고 계셨다.
Which way would it be better?
2010년 하반기가 되면서부터 벌써 많은 동기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수련이 좋을지 봉직의 자리를 알아봐야 하는지, 아니면 과감하게 개원자리를 보러 다녀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개원을 하자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원장님’이라는 자리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봉직의를 하자니 지금 다시 수련 받으러 가지 않는다면 다시는 수련에 대한 기회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수련을 다시 받자니, 꼬여버린 선후배 관계가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풀어져버린 나 자신이 다시 예전처럼 팽팽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여러모로 고민한 끝에 다시 수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교 병원에 지원하여 일단 인턴에는 합격하게 되었다.
End 그리고 and
수련을 받으러 가기로 하고, 인턴에 합격하고 나서는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들이었다. 그간 하고 싶었던 일들,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해 보니 단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더욱이 경산에는 모든 치과 공보의가 3년차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일을 손에서 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4월 20일이 되었다. 함께 근무했던 보건소 직원들도 면사무소 직원들도 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만 혼자 빠져 나오려니 뭔가 모를 아쉬움이 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 간 생활했던 관사에서 모든 짐을 빼고 휑하게 남아있는 방을 보자니 가슴 한 켠이 시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출근하는 병원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바쁘디 바쁜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2주가 지난 지금은 불과 3주전의 공보의 생활이 마치 3년 전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언젠가 모든 수련 과정을 마치고 뒤돌아 봤을 때, 지금의 인턴생활 역시도 까마득하기만한 날이 되기를 오늘도 바래본다.
한상협
경북대학교 치과병원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