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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3번째) 뼈 국 (하)

뼈 국 (하)


<지난호에 이어 계속>


그때쯤, 엄마와 할머니의 합동 작전이 시작됩니다. 장작불을 지피시고, 넓은 솥에 물을 끓이기 시작합니다. 장작불이 타는 것과 동시에 부숴진 등뼈가 된장과 함께 끓게 되면, 장작불의 연기와 열린 솥뚜껑에서 품어져 나오는 수증기에는 푹 곰삭은 된장 냄새와 등뼈 육수가 어우러져 달콤 담백한 향기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 속으로 함께 피어 오릅니다.


이 기억은 평생 못 잊을 듯합니다. ‘술익는 마을’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연상이 됩니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검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노을, 어두워져가지만 뚜렷했던 뭉게구름, 밑이 까만 솥을 데우는 빨간 장작불, 눈물 나게 매운 회색빛의 연기, 뚜껑을 열었을 때 퍼지는 하얀 뼈국의 수증기, 귀에는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바삐 솥뚜껑 여닫는 소리. 그리고 곰삭은 된장과 등뼈가 발산하는 달콤 매콤한 뼈국 내. 목은 벌써 입안에서 분비하는 침으로 연신 꼴깍. 집안은 서서히 어두움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80년대 어느 즈음의 담양말이죠.


여전히 바삐 움직이시는 엄마와 할머니.


등뼈가 된장 속에서 잘 끓게 되면 이번에는 시장에서 주어 온 파란 겉배추 잎이 들어갑니다. 일명 시래기(서울말은 우거지인가요? 이젠, 시래기로 하겠습니다).


시래기는 절대 깨끗하고, 노란 속배추가 아닙니다. 간혹 배추가 귀할 땐 열무로 만든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김치 담그기 위한 품질 좋은 배추 잎이 절대 아닙니다. 수확하면서나 유통과정 중에서나 흠집이 약간 생긴, 주인이 벗겨냈건 사려던 소비자가 벗겨냈건 배추가게 옆에 너저분히 흩어져 있는 그 배추 잎입니다. 간혹 하얀 배추 잎 겉에 까만 선이 보이기도 하고요. 초록색 부분의 겉잎 끝부분이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벌레가 파먹은 부분도 보입니다. 이게 진짜, 시래기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국에 들어가기 전에 깨끗이 세척한 후, 한번 살짝 데쳐서 찬물에 담가 놓은 것 같군요. 하지만 시래기는 국물에 들어가는 때와 끓는 시간이 제일 중요합니다. 너무 오래 끓이면 다 풀어져서 흐물흐물해지게 되고, 너무 조금 끓이면 뻣뻣하고 뻐신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알맞게 익은 시래기는 씹으면 매콤한 국물 속에서 달콤한 단물이 나옵니다. 진한 뼈국 육수도 적당히 머금고 있지요.


끓는 시간은 뼈와 고기의 맛도 달라지게 하지요. 너무 오래 끓이면 고기가 갈라지고 푸석푸석해지고, 물렁뼈도 흐물흐물해집니다. 또 짧게 끓이면 고기는 질기고, 육수는 맛이 안 배어나죠. 물렁뼈는 뜯어 먹기 힘들구요 (전 개인적으로 등뼈 사이사이의 물렁뼈를 제일 좋아합니다). 좋은 맛을 결정하는 때와 시간을 엄마와 할머니는 정확히 알고 계신 듯하였습니다. 두 분이 합동으로 끓여내신 뼈국은 국물 맛은 물론, 시래기와 뼈, 고기 모두가 삼위일체가 되어 있었거든요.


모든 음식이 그렇듯, 뼈국도 바로 끓여서 먹는 게 제일 맛있습니다. 바로 지어 낸 따뜻한 밥과 함께 먹는 게 개인적으로는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아싹아싹 씹히면서 나오는, 육수 머금은 시래기의 달콤함과 흰쌀밥의 달콤함을 정확히 느낄 수 있으니까요. 다 발라 먹은 뼈다귀를 입에 대고 빨아보면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골수 맛을 느끼는 것도 색다른 맛이지요. 


적당한 시기가 되면 고춧가루를 적당량 풀고 끓이면 냄새가 정말 하늘 끝까지 올라 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투명한 물에 뼈가 들어와 끓으면서 하얗게 되고, 된장이 들어와 누렇게 된 후, 파란 시래기가 들어가면 노르스름하고 검푸르던 국이 빨간 고춧가루로 완벽한 뼈국을 이룹니다. 노르스름한 듯 빨갛기도 하고, 검푸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당신은 뼈국을 좋아하진 않으셨습니다. 우리 엄마도 별로신 듯. 그런데 왜 그토록 뼈국, 뼈국 하셨을까요? 그 일은 돌아가시기 1, 2년 전까지 줄곧 할머니의 가장 큰 역할이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노년에 들어서셔서 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업무처럼! 사랑스런 당신의 자식들 멕이고자, 귀여운 손자들 멕이고자, 속치마 안속 당신의 꼬깃꼬깃한 용돈을 아낌없이 내 놓으실 수 있으셨겠죠. 단지 아들이, 손자들이 좋아하니 기분 좋게, 기꺼이 희생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요즘 들어, 저도 우리 얘들 입에 들어가는 거 보고 있으면 행복하듯. 얘들과 대비시켜 보니 당신의 그 깊은 내리 사랑이 이제야 느껴지네요.


하지만 할머니 돌아가신 후론 엄마의 솜씨가 변한건지 내 입맛이 변한건지, 할머니의 정성이 없어선지, 장도리로 잘게 부순 등뼈가 아니라선지, 도무지 그 맛을 느껴본 적이 없네요. 당신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요 근래까지 그 맛이 아니에요.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삼대가 다 같이 모여 땀 뻘뻘 흘리며 먹던 그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까요? 시중에서 파는 이조뼈다귀, 조마루뼈다귀, 천하뼈다귀감자탕, 박씨네감자탕, 추풍령감자탕……. 다 그 맛이 아니에요.

  

내 마음속 풍경들-비 온 후 안개 자욱이 낀 날도 좋았고, 한여름 지독히 더운 날도 좋았고, 추운 겨울엔 더욱 좋았던, 뜨거운 뼈국 한 그릇 먹고 싶네요. 아삭아삭 씹히는 시래기도 좋았고, 손으로 잡고 뜯어먹던 물렁뼈 많은 뼈다귀들도 좋았지요. 뜨거운 국물에 뜨거운 밥을 말아 먹으면 너무 행복했습니다. 차갑게 식을라 치면, 바로 뜨거운 국물을 서너 번씩 떠 갖다 주시던 엄마. 이때, 할머니 꼭 한마디 하시죠.


“띄엿띄엿할 때 먹어라!", “다 식었겄다. 애미야! 애비하고, 래준이 띄엿띄엿한 거 더 퍼다 줘라!", “한 그릇 더 먹어라.”


다음 담양 내려갈 땐 돼지등뼈 준비부터 시래기 준비, 장작불 피우기, 땀 흘리며 국끓이기 이 모든 과정을 나의 할머니와 나의 엄마, 나의 가족이 지켜봤듯이 엄마와 나의 아내와 나의 얘들이 함께 하고 싶네요. 허기진 배를 꿋꿋이 기다리며 구수한 육수냄새의 유혹을 침만 삼키며 참아내며, 온 가족이 만들어 낼 기막힌 작품을 꿈꿔 보네요.


오늘도 난 80년대 담양의 야트막한 스레트 지붕아래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가는 저녁놀 즈음 나지막이 풍기는 장작불 연기 내음을 배경 삼아, 네모난 대나무 평상 위, 갈색의 둥그런 식탁에 온가족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박래준

비타민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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