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 너무나 다른 의미로 다가 오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경험이 인생의 큰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어릴 적의 나는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일도 많은 꿈 많은 소년이었다. 당시 또래라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던 장래 희망 과학자와 대통령 뿐 아니라 소설가나 기자도 되고 싶었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 같은 멋진 고고학자 역시 되고 싶었다. 하지만 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만큼 실제 진로를 결정할 때의 혼란스러움 역시 남들 보다 더 했었다. 인디아나 존스는 영화 속의 주인공일 뿐 실제 고고학자는 아니라는 식의 현실을 알려주는 주변의 충고 역시 그 혼란을 더하게 만들었다.
장래에 대한 결정을 위해 고민하던 와중에 그 날 왜 아버지의 병원을 찾아갔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그 광경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병원 문을 들어서고 병원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여느 때와 같이 진료실을 가로질러 원장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진료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 없이 봐왔던 진료하시는 아버지의 등. 하지만 그 날은 왠지 그 뒷모습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다. 뒤에서 아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의식도 못한 채 진료에만 집중을 하고 있는 한 치과의사의 뒷모습.
그때 느낀 것은 단지 ‘가족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할 때 느끼는 부모에 대한 고마움 이상의 무엇이었다. 숭고함, 든든함, 묵묵함, 따뜻함, 강인함, 자랑스러움. 그 짧은 시간에 스쳐간 수많은 느낌들은 아직도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흔히 아들이란 아버지의 뒷모습을 좇는 존재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날 나는 그 이야기처럼 내 진로를 치과의사로 잡았다.
남들 보다 영민하지 못한 탓에 치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삼수를 해야 했을 때 간신히 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던 공부에 지치고 뒤처짐에 상처 받았을 때 마다 ‘왜 치과의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때 마다 나 역시 훗날 나의 아이들에게 똑같은 등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 마음은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주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덧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같은 치과의사로서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사실 아버지의 등은 그때 그 만큼의 거리 그대로 나를 앞서 걷고 있다.
단순한 치과의사의 진료 모습이 아니라 그의 인생 그의 철학 모든 것을 말없이 보여주는 아버지의 등. 때로는 이 나이에도 부모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 토록 애타게 찾는다는 인생의 ‘멘토’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닮아갈 수 있는 삶이기에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그리고 치과의사로서 아버지의 등을 좇는 인생을 사는 것이 행복하다.
이승훈
이수백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