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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2번째) 대믈리에의 축재(蓄財) (상)

대믈리에의 축재(蓄財) (상)


“제가 2만원을 모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디다 투자를 해야 할지 방법 좀 알려주세요."
난 은행지점장에게 진심 어린 말로 이렇게 물어 보았다.
“정기 예금을 하지. 복리 15%를 쳐 줄 테니 우리 상업은행에 맡기라구."


그는 이런 뻔한 대답으로 날 실망시켰지만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그 돈을 바로 은행에 예치했다.
대전 상업은행 바로 뒤에서 살았지만 실은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난 은행거래를 할 줄 몰랐다. 돈이 생기면 그냥 땅에 모아 두었다. 긴긴 겨울밤을 위해 다람쥐가 도토리 물어다 감추듯이 땅을 파고 숨겨 두었던 것이다. 마침 이웃집이 양옥으로 영국식 빨간 벽돌 담벼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담벼락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 담 밑을 파고 돈을 파묻었다. 도둑이 담을 넘어 가는 것은 봤어도 담벼락 밑을 파간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기에….


지금도 정확히 생각나는데 돈을 잘 접어 비닐에 싼 후 깡통 속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수관(雨水管)을 피해 내 딴에는 숨긴 장소를 잊지 않으려고 관으로부터 몇 번째 벽돌을 기억하고는 그 밑에 묻었다. 물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고약한 놈 패스워드 변경하듯이 위치를 옮기곤 했다.


집 앞에는 작은 점방이 있었다. 아주 작은 하꼬방(箱房) 가게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가지 군것질 거리와 생활용품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언제부턴가 점방 근처에서 놀게 되면서 슬슬 가게 안의 물건에 대한 가격을 외우게 되었고 그 아주머니는 나를 시험해 보았다.


이런 식이었다. “이 과자는 얼마지?" “한 개에 10전이요."


어느 날인가 다시 한번 시험해 보고 난 뒤 확실하게 믿음이 갔는지 나를 고용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점방 아주머니는 하루에 한번은 꼭 물건을 떼러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나를 불렀다. 나를 고용한 이유는 분명했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비용 고효율의 법칙에서 가장 적합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이다.


근로 계약은 간단했다. 과자와 돈 중에서 택일 하는 것이었는데 난 언제나 돈을 택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돈을 쥐어 주고는 써 먹었다.


몇 살부터인지는 몰라도 난 다른 아이들 보다 글자를 훨씬 먼저 깨우쳤다.


글자를 일찍 알게 되어 득을 본 경우는 많았다. 특히 만화가게에서. 주인은 내가 나타나서 만화를 봐도 그냥 두었는데 아마도 글자를 모르는 녀석이 그림만 보고 가는 줄 알고 내버려 두었던 것일 게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 않아 들통이 나서 공짜 독서는 그리 오래 지속이 되지 않았다. 50년 말에는 거리의 하꼬방(箱房)에서 서점용 만화를 길가에 죽 늘어 놓으면 돈을 내고 길거리에서 보는 그런 구조였다. 처음엔 만화방의 규모가 작고 서로 간에 여유가 있었으나 점차로 만화가게가 건물 안에 자리 잡으면서부터는 인심이 빡빡해져서 더구나 수월치 않게 됐다.


만화방이 생기면서 만화를 보는 것도 돈을 주어야만 되어 난감해 진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자주 못보고 어쩔 수 없이 ‘가는 세월"을 한탄하는 수밖에….


산호가 그린 정의의 사자‘라이파이" 는 태백산 깊은 산속에 요새를 차려놓고 세계 평화를 깨뜨리는 악당들을 물리치는‘순 국산" 전사이기에 그 열광은 가히 폭발적인 수준이었다. 가난한 시절, 찢어지게 못사는 나라의 우리들에겐‘제비호"를 타고‘제비양"과 커플로 다니면서 공중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악당들을 물리치는‘라이파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군인 학생 등 명찰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은 집 앞 전봇대의 철사 밧줄―당시에는 전봇대를 지지해주는 철사로 된 밧줄이 전봇대에 비스듬히 늘어뜨려져 있었다―을 붙잡고 멍청히 혼자 놀다가 더 멍청한 어떤 군인 아저씨의 명찰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마 그 군인은 우리 집 앞 전봇대를 만나는 장소로 삼아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놀랬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나를 데리고 점방에 가서 과자를 사 주었다. 아마 그 군인은 자기 이름도 모르는 채 살고 있다가 내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알려 주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그거다!


장사가 좀 되겠다 싶어서 그 후부터 전봇대 앞에서 명찰을 단 사람이 나타나길 하릴없이 기다렸다. 오랜 시일이 지나 한 학생에게서 같은 방법으로 다슬기 한 봉지를 얻어먹었다.


두 번을 그렇게 얻어먹었는데 그 일도 곧 걷어 치웠다. 내 나이가 많아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다지 신기함이 없어져서 였는지 더 이상 지속되지가 않았다.


나에게 먹을 것을 사준 군인은 후에 32 사단장이 되었고 학생은 충남대 총장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아무튼 두 분 복 많이 받으셨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박정용

그린치과의원 원장

(필명 대물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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