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42번째
안국동 북촌 산책길
저녁을 먹고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는 안국동을 산책한다. 운치 있는 달을 보면서 경복궁 담벼락을 걷는 것이 즐거운 일과이다.
삼청동에 있는 빵집에 들러서 내가 먹을 올리브 치아바타와 남편이 좋아하는 파이를 사고, 빵집 건너편에 원두를 파는 커피숍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삼청동 가게들을 구경한다.
경복궁 길에 새로 돋은 은행나무 잎의 여리고 사랑스런 연한 연두 잎 색깔도 유심히 보고 고궁너머 하늘과 북악산 자락도 본다. 저녁시간이라 갤러리 문은 닫았지만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전시품들을 기웃거린다.
내가 자주 들리는 모자가게가 있다. 프랑스 모자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예쁜 모자가게 주인은 매일 밤늦게까지 모자를 만든다.
한 개를 만드는데 꼬박 2일이 걸린다고 한다. 진열대에는 별로 모자가 없다. 만들어서 팔기에 항상 시간이 빠듯하다고 한다.
종업원이 없이 혼자라 모자 사려는 손님이 없는 저녁시간이면 문을 닫고 바느질을 한다.
지나가다가 혼자 일하고 있는 것이 보이면 나는 문을 두드려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기도 하고 집중이 잘 안 되는 날에는 나를 가게에 들어오게 해서 만들고 있는 모자를 씌워보기도 한다. 아직은 젊고 자기가 꼭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어서 혼자서 일하는 이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가 만든 모자를 쓰고 이 동네를 다니는걸 길거리에서 만날 때 면 무척 좋아한다. 모자를 보고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
오래된 가구를 파는 가게주인은 길거리에서 자그마한 기념품 인형을 팔고 있어서 자주 인사를 한다. 지하에 큰 가게가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단골들은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이곳을 안다. 남편과 나는 자주 이 집에 들린다. 요즘은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어도 둘 곳도 없고 가격도 10년 전보다 참 많이 오르기도 해서 요즘은 대부분 구경만 하고 온다.
길거리에 서 있던 주인은 우리를 보면 지하 가게에 있는 물건을 자주 보여준다. 참 흥미롭다.
이 동네 사람들의 조금은 여유롭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면이 조금씩 더 좋아진다
불쑥불쑥 들릴 수 있는 갤러리나 가게와는 다르게 쉽게 출입할 수 없어 담 너머로만 가늠할 수 있는 궁금한 장소가 있었다.
100년이 넘은 안동교회 맞은편 윤보선 전대통령 고택이다. 궁궐이 아닌 고택이 주는 운치가 남달라 나는 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을 자주 간다.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형태를 갖춘 윤보선 전대통령의 고택은 99칸으로 정원이 넓은 이 집은 4대째 이어져 살고 있다. 지금은 윤보선 전대통령 아드님이신 윤상구 부부가 기거를 하고 있다.
안동교회의 바자회가 열리기도 하고 내셔널 트러스트 문화 유산의 만찬 장이 되기도 하는 이 집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며 지금도 유연히 이 시대에 대처한다.
지인의 초청으로 드디어 이 고택을 방문할 기회가 왔다.
해마다 이 맘 때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Seoul Spring Festival of Chamber music)가 열리기 전 주말에 SSF 프렌즈라는 후원회를 초청해서 살롱콘서트를 연다.
연주회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정원과 잘 보존된 고택을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봄의 화사함과 고택의 여유로움이 함께 느껴졌다.
긴 담벼락을 자주 지나다녔던 때문인지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고택정원에서 열리는 음악회 중간에 안동교회의 6시 종소리가 울렸다. 교회종소리도 새소리도 연주되는 음악이랑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것이 살롱 음악의 묘미였다. 도심 속에 이런 아늑한 공간의 이 집 주인장은 정원에서 종종 문화행사를 하는 멋스러움을 지녔다. 이곳은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생활 공간 이기에 더 정겹고 윤택한 느낌이 운현궁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이 고택의 특별한 정취인 것 같았다.
새소리, 꽃 향기, 화사한 봄 햇살이 어우러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씨가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더욱 더 감미롭게 했다.
사람이 누리는 사치가 많이 있겠지만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새소리와 한옥처마 위로 쳐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부드러운 석양, 선선한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달콤한 꽃 향기를 느끼면서 바로 눈 앞에서 좋아하는 음악가의 연주를 고택 정원에서 즐길 수 있는 사치보다 더 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싶다. 연주회가 끝나고 정원에 마련된 음식과 와인을 들면서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던 고택의 툇마루의 정겨움은 오래 간직될 것 같다.
하정선
고른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