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75번째
그래서 행복해 지셨습니까?
20대 80의 법칙이 있다.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가져 온다는 말이다. 즉, 원인의 작은 부분이 대부분의 결과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파래토라는 경제학자가 실험을 했다. 100마리의 개미를 모아 놓고 집단생활을 관찰하던 중 특이한 사항의 모습이 관찰되었다. 100의 개미 중 열심히 먹이를 나르며 일하는 개미는 단지 20여 마리이고 나머지 80여 마리의 개미는 그냥 습관적으로 왔다갔다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열심히 일하는 개미 20여 마리들만 모아 다시 100마리의 집단을 구성해 다시 관찰해 봤다. 그랬더니 역시 이중 20여 마리만이 열심히 먹이를 나를 뿐 나머지 80여 마리는 역시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철 따라 내가 주로 입는 옷의 80%는 옷장에 걸린 옷의 20%에 지나지 않으며, 상위 20% 부자가 한 나라의 부의 80%를 소유한다던지, 전체 범죄의 80%는 전체 범죄자들의 20%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으며, 백화점의 하루 매상 중 80%는 그 백화점의 단골인 20%의 손님이 올린다. 심지어는 내 인생에서 20%의 삶이 나머지 80%의 삶을 좌우 한다든지.
그렇다고 해서 20%를 만들어 내는 80%의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만 치부하는 오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개미들의 실험에서 봤듯이 80의 개미가 있었기에 20마리의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닐까? 파래토의 법칙을 달리 표현하면 80%의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나머지 20%의 효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백도 볼 수 있어야 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도 수용하며 누릴 줄 아는 신선한 여백의 미학을 깨우쳐야 한다.
로랑 구넬이 쓴 소설 ‘신은 언제나 익명으로 여행한다’에는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서 곳곳이 피해야 할 함정이 곳곳에 숨겨진 전쟁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신을 풍성하게 해 줄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는 거대한 놀이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어차피 태어나 살아야 할 삶이라면 그 삶을 전쟁터로 볼 것이냐 놀이터로 볼 것이냐에 따라 즐거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다.
99%를 벌면 1% 마저 벌어 채우려고 발버둥 치다 벌어 논 99%도 못 쓰고 죽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가져가지 못할 것을 기를 쓰고 벌면 뭐하나? 자기가 쓰고 죽는 것만이 자기 것인데. 파래토의 20%의 부류에 속해 100을 채우려 발버둥 치며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개중에는 가진 것 대부분인 99를 내 놓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왜 그런 기삿거리에 감동만 받고 참여할 생각을 못하나하는 잠시 잠간의 상념에 젖다가, 참 난 주머니가 비었지라는 허탈감에 빠져든다.
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의도하지 않게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다시 개원을 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나간다. 통계적으로 치과의사는 평생에 3번 자리를 이동 한다고 들었다. 평균이니까 개중에는 한 번도 안 움직이는 엉덩이 무거운 붙박이 치과의사도 있을 거고 4~5번 이동하는 철새 치과의사도 있겠지만 주위의 동료 선배 치과의사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나는 3번 이동하고 4번째 개원 이니 평균은 한 것 같다.
지난 10여 년간 서초구에서 개원하며 그곳이 나의 마지막 치과라니 생각하며 진료하다 본의 아니게 선배의 꼬드김에 넘어가 제도권 안에서 이런 일 저런 일 굳은 일 마다 않고 나름 지역 치과계에 기여했다고 자부한 10여 년이었다. 돌이켜 보면 한심한 생각도 든다. 과연 그 기간에 난 거기서 행복했었을까?
이 세상에는 동그란 사람, 뾰죽한 사람, 별난 사람도 있다. 주위 사람과 부딪치는 게 싫어 둥글둥글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뾰죽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내 편이니 네 편이니 하며 선을 긋고 세력 몰이를 하는 별난 사람도 있다. 3년 주기로 벌어지는 이런 현상이 잠잠하던 동네 치과의사회에 파문이 일어나곤 한다. 난 성인군자도 아니고 철저한 기독교 신자도 아니지만 성경에서 배운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그래서 다 사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동그란 사람에게서 뾰죽하고 별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모두를 사랑하려니 내가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다시 찾아 본 성경에는 모두 다를 사랑하라고 하질 않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그래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내가 널 사랑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난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너로 인해서 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 전에는 끝이 안보여 접을까 말까 하던 차에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일할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나의 미래와 비전을 갖게 해 주었으니 참 고마워해야지. 그래서 난 행복하다. 여러분은 그래서 행복해 지셨나요?
원덕희
다사랑연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