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고민이었다. 사춘기 때에도, 대학입시 때에도, 재수를 결정할 때에도, 결혼을 할 때에도, 개원지를 정할 때에도…. 이번 고민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해외 이민 하면 생각나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노후를 위해서’는 핑계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치과의사로서의 나의 삶이 왠지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충고해주었다 ‘네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다’고. 맞다. 100% 동의한다. 나는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라는 또 하나의 참으로 따끔한 문구를 애써 한 귀로 흘리고 캐나다 행을 강행했다.
우연한 기회였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고 캐나다 면허 취득을 위한 스터디 그룹을 결성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항해라는 것을 모두 알았지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항했다. 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둘도 없는 동료가 되었다. 총 5가지의 시험을 치렀다. 1차 시험을 위해서는 해부학, 병리학, 약리학 등 기초학 공부를 20년 만에 다시 해야 했고, 수험료만 500만원에 달하고 이틀 내내 치러지는 3차 시험인 실기시험을 위해서는 프렙에 자신감을 가질 만한 보철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15년 동안 굳어진 내 습관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내 생에 가장 정성들여 한 프렙을 마네킹에 했다는 게 참 우습기도 했다. 다행히 약 2년가량의 항해를 통해 대부분의 동료들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여 결실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을 희생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시기였는데 말이다. 주변에서는 막연하게 결과만 보고 나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보았다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치과의사들이 외국 치과의사들의 삶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만, 나는 해외에서 특히, 캐나다에서 치과의사들의 진료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단조롭고 수입도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나는 캐나다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시간에 집중했다.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은 모든 것을 얻고 난 후에 생겼다. 캐나다 치과의사 면허증과 캐나다 영주권을 양손에 들고서 기쁨도 잠시 정말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가야하나? 부모님, 친구, 이웃, 어려운 상황에서 어렵게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병원을 버리고? 공립학교 교사인 와이프를 데리고? 그리고 학교를 정말 즐겁게 다니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의 월권행위가 아닌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고민을 아주 길게 하지는 않았다. 삶에 있어서 개똥철학이라도 철학과 원칙이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망설여지는 일은 하고보자’라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설여지는 일을 하지 않게 되면 미련과 후회가 남지만, 망설여지는 일을 하게 된다면 후회는 있을 수 있어도 미련은 안 남지 않는가? 후회보다 미련이 더 무서운 병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즐거운 일도 생겼다. 항상 공직, 교직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모교 실습시간에 외래교수로 출강하거나 치위생과 강의를 나갔었는데, 캐나다 면허취득을 위한 긴 항해에 필요한 지도와 나침반을 손에 쥐고 있다 보니 캐나다 면허 취득에 관심이 있는 선생님들을 도와드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나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해외진출을 원하는 치과의사 선생님들을 위해 카페(http://cafe.naver.com/ndeb2adc)를 운영하고 있는데, 카페를 운영하고 강의를 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큰 즐거움 되었다.
해외 면허 취득 또는 해외 이주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막연한 목표를 위해 희생해야 할 것들도 많고, 기회비용도 톡톡히 치러야 한다. 그동안 해외로 진출한 많은 선구자들이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여쭤보시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한국을 떠날 결심을 했느냐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다시 답한다면 ‘내 인생에 미련은 없었으면 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강주성 경희치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