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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년 가을 어느 날 나는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행사로 시각장애인이 세계 최고봉에 등정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시각장애인 친구 송경태는 평소 삶 자체가 에베레스트라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고 싶다는 희망을 말했었고, 그 위험성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난 단지 소개만 해주고 빠지려했는데, 산을 평생 사랑했고 산악인에게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고, 근무력증인 형님을 생각하니 이런 우리 집안의 아픔을 산으로 승화시키고 하는 바람과 시각장애인 친구와 함께 등정하면 의미 있겠다는 생각으로 단장을 맡기로 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도 모르게 간다고 약속해버렸다. 그렇게 평생 산을 좋아했던 산악인으로서 나 자신의 극기에 대한 도전으로 산악인들의 로망인 에베레스트 등정을 결심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 프로젝트는 2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매주의 산행과 수십 미터의 암벽과 빙벽 훈련, 한라산 장구목 설벽 훈련, 그리고 2014년 2월엔 아일랜드피크(임자체 6,160m) 등정 등 성공과 함께 고된 훈련의 강도를 높이면서 내 삶은 온통 산이었고 등정 꿈만 꾸었다.
가족들을 포함한 일부에서는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이런 시도에 대해 염려와 협박(?)을 보내기도 했고 준비 과정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산악회 회원 여러분들과 그 외 많은 분들의 따뜻한 후원과 격려를 받으면서 용기를 얻었고 모두 정상 등정의 소식으로 보답하리라 다짐했다.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 출발일이 되었다. 2015년 4월 3일(금) 새벽 가족들과 친구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는 마음의 배웅을 받으면서 전주를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오전 6시 30분에 도착했다. 시각장애인을 포함해 총 5명의 삭발한 대원들이 합류,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님 등의 격려의 말씀과 기념촬영을 마치고 정상 등정을 꼭 선물로 안겨주리라는 약속을 걸고 우리나라를 출발해 에베레스트 나라 네팔 카트만두공항에 도착했다.
4월 7일 카트만두를 출발하여 연일 강행군과 대원들의 노력으로 16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50m)에 입성하였고 그 후로 고소적응 훈련이 계속되었다. 해가 뜨면 더운 25℃ 이상이지만 해만 지면 추워지는 15℃ 이하의 추운 날씨였고, 저녁에 추워지면서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 영하 10℃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고소 부적응으로 잠 못 이루는 밤도 있었고, 텐트 일부가 무너지는 심한 바람을 겪었으며, 강한 햇빛으로 코와 볼이 화상으로 헐게 되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연인이나 부부끼리 또는 혼자 오는 많은 트래커들, 그리고 우리나라 다른 등정 대원들 등이 어우러진 등정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7080 노래, 한 잔의 따뜻한 커피와 맥주, 따뜻한 온수 목욕, 몸을 온기로 녹여 주는 따스한 햇빛, 트래커들의 온정, 그리고 멀리서 보았던 에베레스트 자태와 그 주변 산들의 풍경 등 꿀맛을 주는 호강에 겨운 여유도 있었다.
우리 모든 대원들은 ‘시각장애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에 오른다’를 성공시키기 위해 추위에 따른 모든 악조건에서도 시각장애인 친구의 눈이 되고 손과 발이 되어 쉬고 싶을 때도 친구를 안내하는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진정 영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송경태는 시각장애인으로서 끝없는 도전과 굴하지 않는 삶의 정신을 지닌 친구로 존경 받아 마땅하고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능재주꾼 나가이버 나관주, 그는 이번이 에베레스트 5번째 도전이고 그 외 원정경험을 30여 차례이상 경험한 고산등반 촬영 세계 최고 전문산악인이다. 양병옥 대장은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손꼽는 전문가이고, 막둥이 하태인은 6살 아들 예닮이를 업고 턱걸이를 30개 이상을 하는 괴력의 사나이다. 참으로 소중한 우리 대원들이 함께 하였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이 간 양대장의 뇌경색 증세(빠른 쾌유를 빌었고 지금은 상당히 좋아졌다)와 헬기후송의 지연, 그에 따른 대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고소적응의 목숨 건 고된 훈련 등의 어려움은 “이렇게 부족한 내가 여길 오다니…” 눈물과 함께 후회감이 들었으며 정말 극복하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4월 25일(토)은 대지진과 눈사태로 죽음과 같은 공포를 안겨준 날이다. 그날 베이스캠프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하여 긴장과 설레임으로 캠프1을 향해 갔다. 고소적응 훈련을 위해 캠프4까지 있으며 그 위로 에베레스트 정상이 있다. 나는 아이스폴 지대, 발이 저절로 더덜더덜 떨리게 만드는 사다리 11개, 떨어질까 아찔한 크래바스, 큰 얼음기둥 사이 등을 차례로 숨이 헉헉 막히는 두려움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전 11시 30분경 갑자기 땅이 움직이고 엄청난 굉음소리가 났다. 1분도 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땅의 흔들림, 거센 눈보라와 눈사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온 몸에 5~10 센티미터 이상 쌓인 눈을 털어내야지만 얼굴이 보이는 설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원 중 한명인 태인이가 내 이름 ‘병선이 형’을 불렀을 때 비로소 ‘아!!!! 살았구나’ 생각했다. 대지진이었다.
다시 방향을 바꿔 눈이 많이 내리는 길을 하산하는데 계속되는 여진이 아이스폴을 흔들었고, 15미터 직벽의 얼음 기둥을 내려갔으며, 거듭해서 내려가니 올라오면서 보았던 얼음 기둥이 일부 무너져 있었다. 크래바스에 분명 올라갈 때 안전하게 있었던 사다리가 틈 벌어져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는데 그걸 지나가야 했고 조심조심 하강이 계속되었다.
얼마 후 하산 중 길이 없어졌다. 아이스폴과 아이스폴 사이 연결된 길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지만 노련한 우리 대원인 관주가 새로운 길을 확보해 줘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대원 모두 방금 전 건너왔던 사다리가 크래바스로 빠져서 ‘휴!!! 살았구나’ 하고 한 숨 돌리고 나서 보니 크래바스에 사람이 끼었다는 것이다. 다른 팀의 셀파가 크래바스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곧 포기했고 우리 대원인 관주가 그 아시안트랙소속 셀파를 구해냈다.
나를 비롯한 우리 대원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침식사를 했던 곳으로 15시간 30분의 사투 끝에 겨우겨우 내려왔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니 눈사태로 우리 양병옥 대장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를 포함한 베이스캠프에 있던 등반객 16명의 사망자와 6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우리를 구조하러 와야했던 나머지 셀파들은 현지 상황이 무서워 모두 고락셉으로 도망가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 대원들은 자연의 엄청난 재앙인 대지진 앞에서 에베레스트 등정을 중도에서 멈추고 모두 있는 힘을 다해 목숨 걸고 살아서 돌아왔다.
사선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인생!!!
더욱 의미 있고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최병선 전주 최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