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5년 12월 23일이다. 지난 6월 27일에 미국 아이오와에 도착해서 이틀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아이오와 치과대학 노인치과 클리닉에서 펠로우 직책으로 노인진료를 시작하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첫 번째 유학을 하면서 갈고 닦았던 영어도 이미 13년이나 지나서 거의 다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척 긴장이 되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하루 종일 환자를 진료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세미나 주제를 선택하고 관련된 논문을 5개를 찾아서 패컬티와 동료 펠로우들에게 금요일 밤 12시까지 보내야 한다. 매주 수요일 밤에는 30분 정도 발표를 해야 하고 질문과 토론을 한다.
다행히 영어는 곧 회복이 되어서 환자와 소통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진료기구나 진료방식이 달라서 무척 당황하였다. 특히 수 십 년 동안 원장으로서 누구의 지시를 받는 생활을 하지 않다가 직급상 펠로우보다 상위에 있는 패컬티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배우러 온 나의 위치를 항상 되뇌면서 지시 받는 것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환자들도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서 진료시간은 매우 즐거웠다. 특히 환자 한 명당 진료시간을 두 시간 배당하므로 환자와 충분히 폭넓은 대화를 하면서 신뢰를 형성하고 진료를 하므로 점점 내원 횟수가 늘어나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영어도 빠르게 늘었다. 특히 다양한 환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다양한 발음, 다양한 액센트의 영어에 익숙해지면서 알아듣는 것이 점점 편해졌다. 특히, 세미나 시간은 기다려졌다. 자기의 의견을 마음껏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좋았고, 발표 후에 토론시간은 더욱 즐거웠다.
주말에는 근처에 있는 호수에 가서 좋아하는 산악자전거를 3시간씩 타기도 하였다. 5개월이 좀 지나면서 임상노인치과학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노인치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 알게 되었다. 자기가 찾는 답을 패컬티들이 직접 알려주지 않고 펠로우들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나이 50세가 넘어서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유학의 기회는 분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료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진료 과정을 매 단계마다 패컬티에게 검사를 받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기구와 장비들을 철저히 소독하지 않는다고 어시스턴트에게 주의를 듣기도 하고, 대부분의 진료를 어시스턴트의 도움 없이 혼자서 기구를 준비하고 진료를 하고 정리까지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환자를 직접 대기실에 나가서 이름을 불러서 찾아서 진료실로 모시고 와야 하는 것도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진료 후 휠체어를 직접 밀어서 환자가 타고 온 차에 태워주는 것도 해야 했다. 미국 환자들은 그런 것을 당연히 환자가 받아야 할 권리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그리고 혼자서 장을 보고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고 혼자서 먹는 것이었다.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생존을 위한 섭취행위였다. 맛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4대영양소만 고려한 생존을 위한 식사.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난 6개월을 돌이켜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많이 배우고 깨달은 기간이었다.
한국에서 임상노인치과학을 제대로 배울 곳이 없어서 항상 불만족이었고, 그래서 잠시 개원을 접고 가족을 한국에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와서 향수병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지만,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노인치과 클리닉이 속해있는 아이오와 치과대학에서 훌륭한 패컬티의 지도아래 임상노인치과학을 배울 수 있게 해준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한국사회에 나는 많은 빚을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앞으로 나의 노인환자들에게 더 좋은 진료를 해주고, 대한민국 치과계에 임상노인치과학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해야겠다.
최용근
아이오와대학교 치과대학
노인치과클리닉 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