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순간 살거늘./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자./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白居易의 <술잔을 들며>에 늘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의 로돌포가 떠오르니 신기하다. 유일한 재산인 詩心마저 미미의 두 눈동자에게 도둑맞아 이젠 빈털터리지만 상관없다며, 탁월함이 작은 풍요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쯤엔 아랑곳 않고 그대의 찬 손과 아름다운 눈동자를 칭송하느라 여념이 없는 싱그러운 세레나데. 로맨틱 코미디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눈부신 금자탑을 쌓은 라보엠이지만, 대체로 풍만한 타입인 일류 소프라노들이 폐를 앓고 손이 찬 미미 역에 영 어색해 관객의 몰입이 어렵다는 웃지 못 할 얘기들도 꾸준히 있었다. 차가운 손이란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Hot Hand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비평에 따르면, 보살펴 주고픈 대상의 손을 잡았을 때엔 (실제체온과는 무관하게) 차갑고 또 애처롭다고 느낀다고 한다. 역시 리추얼의 정점엔 감각의 제국이 우뚝 솟아 있군요. (군 통속어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사수란 단어의 수 자도 후임을 보살피는 손이란 뜻
아들이랑 프리미어 리그 골 모음을 보는데, 관중석에 ‘Mind the Gap’이란 손 팻말이 있었다. 별로 안 궁금한 척 담담한 표정으로 나름 괜찮은 말이네 툭 던졌더니 역시나 걸려든 아들은 천일야화 같은 EPL스토리를 풀어 놓는다. 어느새 물으면 짐짓 잘 안 가르쳐 주고, 다 안다고 하면 굳이 더 많은 걸 알려주려고 하는 남자 그 자체가 되어버린 아들에 한동안 아연실색 했었지만, 곧 대책이 섰다. 뭐 이쪽도 내공이 있으니까. 손흥민이 있는 토트넘 핫스퍼와 아스날이 북 런던 라이벌인데, 오랫동안 아스날이 절대 우위였지만 올 시즌 토트넘이 리그순위에서 앞섰단다. 한 때 초강팀 이었지만 최근 계속 부진했던 아스날의 팬들이 지역 라이벌인 토트넘 보다는 성적이 좋다는 점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여기며 하던 말이 바로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적어도 토트넘 하고는 승점차가 좀 나지. 그 격차를 명심해! (Mind the Gap!)” 이란다. 오늘 저 팻말은 그러니까 토트넘이 올 시즌 선전하고는 있지만 과거를 통틀어 아스날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는 뜻 정도일 텐데, 북 런던 더비가 100년이 넘은 라이벌전이고 팬들의 충돌을 우려해 반드시 한낮에 열리는 치열함을 감안해 준다 해
열대우림의 스콜처럼 폭우가 내린 주말 동안 九旬의 원로선배님과 불의의 사고를 당한 선배님이 우리 곁을 떠나셔서 마음 속 하늘에는 며칠 후까지도 비구름이 낮게 떠 있었다.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미소와 음성이 뇌리에 있어선지 가슴 한 구석이 많이 아파왔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은 알고 보면 실은 거의 일상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자주 일어나지만, 그 파동은 번번이 새삼스럽고 거센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기란 수월치 않다. 주위가 낯설어 보이고 자꾸 외로워지는 이런 느낌을 슬픔 말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울적함을 달래려 동작대교로 한강을 건너 퇴근하기로 했다. 蓮步渡河라고 이름까지 붙여놓은 내 작은 의식인데, 항상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 개인 뒤 석양이 조연일 땐 금상첨화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다리 북단 쪽에선 미군기지 담벼락을 오른쪽으로 내내 끼고 돌며 한참을 한 줄로 올라가야 하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진입로인데 차들은 별로 급한 기색이 없다. 급한 사람이야 이태원부근에서 이미 반포대교 쪽으로 내 뺐을 것이다. 지루함에 두리번거려봤자 볼거리도 별로 없는 좁은 길에 가다 서다 소걸음에도 얌전하기만 하다. 이촌동 쪽에서 오던 차들이 끼어들기
희고 빨간 꽃들이 넘실대는 모네의 양귀비 밭과 땅에 닿을 듯 낮게 내려와 떠 있는 흰 구름, 푸른 하늘까지도 그림 속 그대로인 프라하에서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의 장례식을 TV로 봤다. 약 보름 전 87세로 타계했음에도 7월에야 장례식이 열린 것은 장례 절차 의논 차 찾아간 아들을 수년전 재혼한 콜의 미망인이 만나주지 않고 경찰을 불러 돌아가게 한 일들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전 독일 총리의 장례식을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 BBC의 중계로 체코의 호텔방에서 보며 유럽을 실감 했는데 영국의 존 메이저 전 총리와 테레사 메이 현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마크롱 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전 현직 정상들이 함께 타국의 전 총리 장례식에 문상 와 나란히 앉은 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과 유럽 연합 결성을 겪으며 독일 역사상 최장인 16년간 총리였던 콜은 초대총리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묘지에 안장된다. 사별한 전 부인의 곁일 것이란 예상이 빗나간 점에 관해 어느 언론도 별 얘기 없이 지나가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약간 감동했다. “과거 독일이 피해를 줬던 다른 나라들을 유럽이란 이름으로 하
보슬비가 내리던 저녁 분당 인근을 지나다 길가의 한 설렁탕집에 들어갔다. 토요일 8시를 넘긴 시각이니 그럴 듯 해 보이는 곳들은 거의 만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들어가 보니 나름 분위기가 있는 집이었다. 재즈(!)가 흐르는 홀에는 충분히 간격을 띄운 테이블들이 스무 개 쯤 되고, 입구 쪽으론 원두커피 포트와 컵 등이 줄을 잘 맞춰 놓여 있었다. 누구든 얌전히 컵을 하나만 뽑아 조심조심 커피를 따르고 설탕도 흘려선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정갈한 커피코너 본 적 있으시죠? 테이블 마다 종이냅킨도 아마 개수를 맞춰 꽂아 놓은 듯 두께가 비슷해 보이고, 배식구 옆의 접시며 물 컵들도 일렬로 줄을 맞춰 쌓여 있었다. 김치 깍두기도 40대의 여사장(으로 보이는)이 직접 썰어다 준다. 손님들이 마구잡이로 꺼내도록 놔 둘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상냥하지만 단정한 인상이었다. 설렁탕집 분위기 치고는 특이했는데 뭐랄까 이 사람들은 무슨 음식점을 하던 결국 이런 스타일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고 성공을 하긴 할 것 같지만 또 어쩌면 성공 따위엔 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자기방식 대로 사는 정돈된 일상 같은 것이 굳이 느끼려고 하지 않는데
일요일 저녁의 결혼식은 이래저래 썩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기 쉽지만 일단 식장에 들어가 앉을 수만 있다면 반전의 묘미도 있다. 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그저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자면 되는 거구나 하는 흐뭇한 자각에 옆 사람과의 서먹한 인사에도, 들려오는 다른 하객들의 대화에도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하는 그런. 잘 지냈냐는 인사에 “그럼!” 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섞인 것일 테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했다간 기나긴 설명이 필요해 질까봐, 뭐 그냥 그저 그렇다며 얼버무리는 웃음 띤 얼굴들과 거들기라도 하듯 그 주위를 감싸는 부드러운 조명들, 멋진 포즈지만 표정만은 애써 무심한 듯 도도한 꽃들의 그윽한 향기 등등은 살짝 눈만 감아도 금세 분별의 자물쇠와 집착의 빗장을 풀게 할 만큼 일요일 저녁의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친척, 학교동창 혹은 옛 직장동료들은 저마다 소곤소곤 한 때 자신들과 꽤 깊은 관계였던 신랑 신부 혹은 그 부모들과의 에피소드들 얘기로 여념이 없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나름대로 잘 적응은 하고 있지만 모두 어느 만큼씩은 그리움을 앓고 있던 이들이 젊은 한 쌍의 결혼 축하를 계기로 모여 그간의 안부와 꽃향기와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거
대단했다는 프랑스 오픈 테니스 여자단식 결승전을 새벽 1시 재방송으로 봤다. 가족들은 모두 잠들고 거실엔 음량을 줄인 채 빛을 내뿜고 있는 TV와 나 단 둘 뿐이다. 밤 비행기라도 탄 것 같은 고적함이 깊고 고요한 대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도 타다가 휘파람도 불다가 정 외로우면 밝은 달을 한번 쳐다본다던 왕유의 시를 불러낸다. 여기가 대숲이라 치고 왕유나 도연명 흉내나 한번 내볼까, 세상사의 모방이지만 훨씬 원칙을 따르고 현실에선 찾기 힘든 정제된 선수들의 자태와 움직임이 있다는 게 스포츠 관람의 매력이니 거문고 연주 못지않은 풍류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 억지일까 등등의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발까지 까딱이며 정작 경기는 반쯤은 건성으로 봤다. 그럼에도 역시 압도적 느낌은 찾아왔다. 마지못한 듯 가느다란 연기를 피우면서도 금세 여름날 대청을 자장가처럼 뒤덮던 모기향처럼. 우승자인 라트비아의 엘레나 오스타펜코는 연못가 바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워터하우스의 그림 속 오필리어를 떠오르게 하는 기다란 붉은 머리를 정수리쯤에서 질끈 묶고 베이스 라인 안쪽으로 2m는 들어간 채 뭔가 계속 중얼거리며 리시브자세 내내 몸을 흔든다. 흘러내린 머리를 매만지고 목걸이에 입을
깍쟁이의 명예를 걸고 (자충수 일듯 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며) 엄선, 정련한 고충 사례 몇 가지. 금연치료차 대기실에서 두런두런 하던 커플이 급기야 큰 소리로 다툰다. 요컨대 남자는 여자에게 끌려 왔을 뿐, 금연의지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내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남자에 이어, 이게 다 빨리 진료와 처방을 안 해 준 탓이라는 애꿎은 항의로 직원을 다그치던 여자도 홱 돌아 나가버린다. 한때는 담배피우는 남자의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거나 적어도 담배쯤은 우리 사랑에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믿었을 지도 모를 여자였을 것이다. 남자 또한 여자의 사랑만 얻을 수 있다면 담배 따위 아무래도 좋았을 거고. 그러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요점은 네가 좋았던 거지 내 삶이 싫은 건 아니었다는 것 쯤 되려나. 그 아수라장과 함께 또 전화통엔 불이 난다. 상악 제2 대구치를 발치하고 가신 아버지가 대략 15분마다 한 번 꼴로 전화를 하시는 중이다. 아직도 피가 난다, 거즈를 바꿀까, 그냥 처음에 물고 있던 그대로 있을까, 밥 먹고 약 먹을까, 약부터 먹을까… 몰라서가 아니다. 85세임에도 아직 활활 불타고 있는 완벽한 기능과 구조를 향한 간절한 열망 탓인 것이다.
“OO에 있다. 몇 시쯤 끝나니?” 아침에 사소한 이유로 다 큰(!) 딸을 꾸짖는 문자폭탄을 날리셨던 엄마로부터 퇴근 무렵 또 날라 온 문자다. 데리러 오라는 말씀. 아직 앙금이 남은 채 도리 없이 가긴 가지만, 조수석에 들어와 앉으신 엄마에게서 살짝 풍기는 익숙한 향수냄새에 어느새 난 묻고 있다. “냉면 드실래요?” 물로 변한 내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종일토록 힘겹게 느릿느릿 흐르다가 저녁 무렵 엄마의 향기라는 절벽에 이르러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원한 폭포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라고 한껏 멋을 부려 봤자 어쩌면 엄마보다 나 자신이 더 미웠던 하루의, 그 싱겁기 짝이 없는 결말이 쑥스러워 내미는 변명일 뿐입니다만. “나는 믿음을 위해 1년간 싸워왔다. 우리가 여기서 이기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훌륭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 격렬한 감수성의 마초작가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속 주인공 조든의 독백이다. 대학서 스페인어 강사로 일하던 청년은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1년간 휴가를 얻어가면서 까지 스페인내전에 참전한다. 헤밍웨이도 그 전쟁에 보병대위로 참전했지만 전투 못지않게 투우나 플라멩코에 매료되
拙稿를 들고 매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후의 따스한 차 한 잔 같은 말벗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더는 바람이 없겠습니다<필자 주>. 사진작가 박관호 원장님이 보내주신 찔레꽃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배경의 맑고 파란 하늘이며 이름 모를 초록빛 들판, 생글거리는 눈망울 같은 하얀 꽃송이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근심거리 다 뒤로하고 훌쩍 떠나보고 싶지만, 가느다란 한숨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햄릿의 독백처럼 인간의 사고력을 넷으로 나누면 하나가 지혜고 나머지 셋은 두려움인걸까? 늘 주저하며 마음속만 데우고 있는 찔레꽃 처럼 애처로운 내 소망들이여. 청계천 공구거리에는 수십 년 간 덧씌운 도로정비로 인해 높아져버린 인도 탓에 정작 상점입구가 50cm는 낮아져서 흡사 반 지하처럼 되어버린 상점들이 있다. 간판도 벽도 몹시 낡고 허름하다. 신호대기하며 애써 안을 들여다보려 해도 어두컴컴한 게 대체 영업을 하는지도 알쏭달쏭한데, 갑자기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며(여닫이 강화유리 도어를 달 수 도 없지요 반지하가 되었으니) 검은 비닐봉지를 든 한 손님이 나온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부속을 구했다는 안도의 기색과, 어두워 얼굴도 제대로 못 본 방금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