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작은 치과 봉사활동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보건소 사업 출장으로 장애인 진료를 많이 보다 보니, 집 밖에 나오기 힘드신 장애인 분들이 치과 치료에 있어 굉장히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치과 치료의 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은 연세가 있으셔서 가족이 없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 외에는 치과 치료에 관해 관심이 적은 보호자들에게 보호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추후 통계를 활용해 원인에 대해서도 분석해볼 생각입니다. 좋은 치료는 정확한 진단에서 나오니깐요. 단체 이름은 “찾아가는 치과봉사회”입니다. 아마 단체 활동의 주축은 치과위생사 선생님들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치과 봉사단체들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살펴본 바에 따르면, 대외적으로 회원을 공개 모집하고 꾸준히 활동하는 치과 봉사단체들의 숫자가 많지 않을뿐더러 대부분 치과의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치과의사의 봉사활동은 굉장히 제약이 많습니다. 치과의사 선생님들께서 봉사활동을 나가실 땐 보통 진료를 생각하시기에 이동식 유니트 체어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료를 도와주실 치과위생사 선생님들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장
요즘 많은 선생님께서 통합치의학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저도 다양한 이유로 통합치의학 학위를 따기 위해 1년간 열심히 수업을 듣고 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리 PPT를 보며 공부를 하고 있으니 같이 있던 친구가 묻습니다. “은욱아, 너는 공보의 끝나고 다시 대학병원으로 가도 되잖아? 왜 굳이 인턴레지를 안 하고 통합치의학을 준비하는 거야?” 학부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분방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입학했던 치의학대학원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입학 첫날부터 양복을 입은 선배들이 와서, 인터넷 기사에서나 볼 수가 있던 그런 부조리들을 나열했습니다. 복장 제한부터 다양한 저급한 규칙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수업 시간에 진열장에 있던 틀니를 잠깐 만졌다며 수백 장의 빡지(A4 용지에 무의미한 내용을 빡빡히 적어서 제출하는 벌칙 중 하나)를 다음날까지 제출하게 하거나, 어시스트를 잘 못했다고 블레이드나 엘리베이터를 학생들에게 욕설과 함께 집어 던지는 행위들, 레지던트들의 많은 부조리에 지쳤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레지던트들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
작년에 치과의사 면허를 따고 그동안 미뤄왔던 의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제시 보건소로 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거제도는 참으로 큰 도시였지만 커다란 섬의 크기에 비해 사람들이 사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치과 검진 버스로 구석구석 다니다 보니 그간 TV로나 만났던 시골 생활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치과 검진 버스를 타고 출장을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엑스레이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해드릴 수 있는 진료는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틀니 위생 교육 및 간단한 수리, 스케일링, 간단한 치과 검진 및 상담 정도의 업무만 진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출장을 나갈 때마다 진료 전에 이 열악한 상황을 설명해 드리지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치과 검진 버스로 올라오시면 그때부터 할머니들의 귀여우신 부탁(?)이 시작됩니다. “아이고 선생님, 이거 하나만 뽑아주소. 내가 이거 땜에 을마나 고생하는데~!” 발치는 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그냥 넘어가고 싶다만, 할머니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시골 출장 진료를 1년간 다니며 알게 된 할머니어(語)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작년 10월 말에 데뷔하여, “EUNUK”이라는 예명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큰 성과가 없어 소소하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시간을 음악 활동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치과의사를 하면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쪽 업계에서는 꽤 특이한 이력이라 음악을 하다 만난 많은 분이 여쭙습니다. “은욱님은 왜 음악을 하시나요?” 24살 때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많은 꿈을 안고 경북대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역시 치의학전문대학원은 굉장히 낯선 곳이었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성향이 맞지 않아, 입학할 때부터 소위 말하는 찍힘을 당하여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학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은 커졌습니다. 다양한 방법들로 답답한 마음들을 풀어보았지만, 일기처럼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가장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노래를 즐기던 터라 자연스럽게 배경음악에 나의 마음들을 써 내려가게 되었고, 이는 곧 노래들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많은 생각이 마음속에 쌓였고, 그럴 때마다 저는 그 마음들을 노래로 제 친구들에게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노래가 10곡, 2
치전원 입학 전 학부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많이 다녔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대단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다녀온 봉사활동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이 뿌듯함과 따뜻함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습니다. 개인적인 만족감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시간 날 때마다 학교 주변, 가까운 곳들로 봉사를 다니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경북대 치전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본과 2학년 때 외래교수님께서 제게 해외 의료봉사를 권유하셨습니다. 해외 의료봉사가 궁금하긴 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진 못했습니다. 비용도 비쌀뿐더러,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비운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도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돈과 시간을 과하게 써가며 외국에 나가는 것은 일종의 사치로 느껴졌습니다. 국내 봉사활동만 수년간 하면서, 그런 마음들은 더 굳어졌던 듯합니다. 지금 내가 내는 이 항공료로 국내에 있는 분들을 돕는다면 더욱더 값지게 도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번은 가보고 싶었기에 이번 기회에 지원하였습니다. 하나둘 준비하였습니다. 현지 역사, 경제, 의료와 교육 등 다